지난 94년 7월17일 오전 4시.

파리 16구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본부내 "그랑 살르(대회의실)".

새벽 정막을 깨는 환호성이 이 유서깊은 건물 지하 대회의실에서 터져
나왔다.

5년을 끌어오던 OECD 다자간 조선협상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던 순간이다.

조금전까지도 서로 으르릉 대던 세계 16개국의 협상 대표단은 "타결"
한마디에 축제 분위기로 돌변했다.

한국의 한 젊은 변호사도 그들 틈에 끼여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국내의 대표적인 통상 전문 변호사인 법무법인 세종의 김두식 변호사(42).

"그날은 마침 제헌절이어서 더욱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구본룡 당시
통상산업부 자동차조선과장(현 산업자원부 석유가스심의관)과 함께 호텔로
돌아와 미니바를 열었더니 술이라곤 알콜없는 맥주뿐이더군요. 그거라도
꺼내 둘이 축배를 나누고 있자니 창 밖에선 이제 막 동이 터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통상변호사로 길을 잡은 것은 지난 90년말.

추준석 당시 상공부 통상심의관(현 중기청장)의 제의로 상공부 자문
변호사를 맡으면서다.

첫 무대는 OECD 다자간 조선 협상.

조선 분야의 정부 보조금 철폐및 반덤핑을 쟁점으로 시작된 이 협상은
과징금 부과의 주권 침해여부를 놓고 복잡한 법리 논쟁에 봉착해 있었다.

"16개국 협상 대표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첫 마이크를 잡았을때
떨리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김 변호사는 일국의 행정기관이 상대국 기업에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헌법상에 보장된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논리를 정연하게 펴 나갔다.

세계 최고의 통상법 권위자인 미국 시카고 대학의 존 잭슨 교수 학맥을
이어받은 그의 통상법 실력은 이곳에서도 빛을 발했다.

당시 OECD 조선분과위원회에서 그의 별명이 "리걸 킴(Legal Kim)"이었음이
이를 반증해 준다.

그로부터 4년 가까이 김 변호사는 줄곧 우리측 협상 실무자로 참여했다.

보직변경이 잦은 공무원에 반해 누구보다도 이 협상의 내막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더욱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통상 전문 변호사.

그러나 실상은 돈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 자문 변호사로 그가 받는 월급은 70만원이 채 안된다.

1년에 10차례 이상 파리 출장을 갔지만 빠듯한 출장비론 별 2개짜리 이상
호텔은 엄두도 못낸다.

그래도 그의 열정을 지켜준 것은 다름아닌 "국익"이었다.

"파리 시내의 허름한 호텔에서 정부 관리들과 밤새 협상전략을 짜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통상변호사는 돈 보고는 못합니다. 영어만 잘해서도
안되구요. ''사명감''과 ''산업에 대한 이해'',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OECD 조선협상이 그에게 안겨다준 또하나의 귀중한 재산은 "국제인맥".

오랜 협상 덕에 각국 대표단과의 친분은 그만큼 돈독해졌다.

지난 95년 우리 정부가 통상문제를 제기한 첫 케이스로 유명한 한미담배
양해록 개정협상의 미국측 수석대표였던 캐시디 USTR(미국 무역대표부)
차관보 역시 "OECD 지기"중 한사람이었다.

"신뢰가 생명"인 국제 협상에서 첫 대면에서부터 상대방 가족의 안부를
물어볼 정도의 교분은 협상을 원만히 타결하는데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줬을 게다.

이 외에도 미국과의 컬러 TV 반덤핑관세분쟁, D-램 반덤핑 관세분쟁 등
굵직굵직한 통상 이슈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갔다.

김 변호사의 "파워 프로"로서의 자질은 지난 80년 법조계에 첫발을 디딜
때부터 꿈틀 거렸다.

"국제거래,국제경제에 정통한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신영무 변호사의
"꼬드김"에 넘어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초임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2대 독자를 4살때부터 혼자 길러주신 어머니는 판사를 원했지만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단다.

그는 이제 자신을 "유혹"했던 신변호사와 함께 국내 2위의 로펌인 세종
(신&김)의 대표 변호사가 됐다.

"이제 ''아무개는 무슨 분야의 전문가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김 변호사가 후배 법조인들에게 던지는 메세지다.

< 윤성민 기자 smyo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4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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