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수 < 전경련 전무 >


중남미국가들은 상당수가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어째서 스페인이 그토록 많은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대체적으로 스페인 군대가 장비면에서 월등했다는 것이 공통적인
지적이다.

보병위주인 인디언에 비해 스페인 군대는 기병을 앞세웠으므로 일단 유리
했다.

또 몽둥이가 고작인 인디언에 대해 총,칼을 사용했고 갑옷을 입었으니
무적이었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인디언 정복은 최근 국제 금융시장 상황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

자금력과 시장분석능력에서 월등히 우세한 선진자본의 진출이 좋은 사례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과거 인디언들이 몽둥이로 스페인의 총칼에
대응하듯이 신진국의 자본에 대항하는 모양이다.

일부에서는 월가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자본의 경우 단순히 자금력만 우세한
것이 아니라 신용평가기관, IMF 등 국제기구와도 직간접으로 연계되어
있는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음모설만으로 현실을 파악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새 수많은 업종에서 외국자본이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생필품은 물론 고급소비재에 이르기까지 외국자본이 진출해 있고 어느
독일기업의 한국지사는 자산규모로 국내 30대 그룹에 들 정도가 되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세계화시대에 국내외 자본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는냐
는 반론이 있다.

정책당국에서도 외자유치는 많이될수록 좋다는 생각을 가진 듯 하다.

대기업들에게 왜 외자유치의 속도가 느리냐고 채근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구조조정이나 대외신인도 제고를 위해 외자가 많이 들어오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돈은 그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선 기술이 따라오고 우수한 인력이 함께 온다.

그러나 부정적이 측면에서는 시장을 빼앗기고 국내정책에 대한 간섭이
따라온다.

최근 주한 미상공회의소가 우리 정책당국에 요구한 내용을 보면 거의
내정간섭적 수준이라는 비판이 나올만 하다.

그만큼 외국자본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웬만한 대기업의 주총에서는 외국인 주주를 위해 동시통역을 하고
있다.

심지어 공기업이라는 포철의 경우도 외국인 지분이 40%에 달한다고 한다.

선진국의 경우 우리보다 주주이익을 중시한다.

따라서 배당률에 관심이 많다.

주주입장에서는 배당을 많이 주는 기업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신용이나 시장가치에 따라 자금조달이 결저오디는 선진국
과는 달리 우리 금융시장에는 자금이 그리 풍부하지 않다.

돈을 버는대로 배당해 버리면 나중에 무슨 곤욕을 치를지 알 수 없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와같이 앞으로는 선진국의 관행과 우리의 현실 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빚어질 것이다.

문제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켜야 한다는 압력이 드세다는 점이다.

글로벌 스탠다드가 무엇인지 아직도 세계적으로 합의된 것은 없다.

기업경영이 투명해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수긍하지만 그 나머지 부분에서
모든 나라가 공통적으로 지켜야할 기준이란게 무엇인지는 명확치 않다.

예컨대 요즘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이와관련된 권고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래서 사정을 잘 모르는 분들은 한국재벌의 총수중심적 지배구조가 국제적
비판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해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에 가장 적합한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점은 최근에 만나본 OECD의 조아나 쉘튼 사무차장도 분명히 했다.

OECD가 요구하는 특정한 형태의 지배구조는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식 기업구조는 모두가 엉망이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모조리 뜯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다시 스페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스페인의 식민지 정복에 관해 최근에는 다른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스페인이 인디언을 정복할 때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총칼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페인 군대에 묻어온 유럽의 풍토병이 싸우기도 전에 인디언을 거의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유럽의 풍토병에 내성을 가지지 못한 인디언들은 감염되지 마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글로벌 스탠더드도 좋지만 그중에는 외국의 풍토병 같은 요인은 없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