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50대의 한 중년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조울증 증세가 도지고 수면제 없인 하룻밤도 지내지 못한다는 그 부인의
사정은 이러했다.

97년초 월급장이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장 생활을 꾸려나갈 일도 막막했지만 교육을 시켜야할 세 아들이 더 큰
문제였다.

그 부인은 궁리끝에 다가구주택을 마련키로 했다.

그해 여름 남편이 남긴 전재산 3억8천만원으로 12가구가 세들어 있는
다가구 주택을 사들였다.

물론 여기에는 전세보증금 3억원이 끼어 있었다.

몇 가구는 사글세로 받아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남편없는 공간을 메워간다는 이 자부심도 잠깐.

IMF사태가 터진 것이다.

그후 이 부인은 어느 하루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집저집에서 전세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여기저기서 돈을 변통해 몇가구는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려해도 저당잡힌 집은 월세나 전세놓기가 어려워
그나마도 할 수 없었다.

전세금을 돌려달라고 하면 "그저 더 있어달라"고 통사정하는 수 밖에
별도리가 없다.

50대 초반인 한 회사원의 사정도 기막히다.

그 회사원은 아들을 유학보내고 싶었다.

유학은 당시 열병처럼 번지고 있을때여서 아들의 성화도 있었다.

전세금을 모아 그 이자로 유학을 시킬 요량으로 단독주택을 헐어 그 자리에
9세대의 다가구주택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세대란이 터지면서 아들은 유학을 포기하고 중도귀국해야만 했다.

그는 지금 전세를 안고 집을 통째로 가져가라고 하소연하다시피 하고
다닌다.

물론 전세금을 내줄 수 없어서다.

결국 평생 모은 전재산을 날릴 판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멀쩡하던 부인이 자주 자리에 눕는다.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부부싸움이 잦아지고 남편의 술자리는
늘어만 가고 있다.

다가구주택 소유자들의 가슴앓이는 이뿐만이 아니다.

은행에서 융자받아 집을 지은 사람들의 사정은 더욱 급박하다.

이제는 파산지경이다.

이자갚을 여력을 잃은지 오래다.

따라서 그들이 갖고 있는 다세대주택은 법원경매로 줄지어 넘어가고 있다.

전세금과 융자금이 집값을 넘어서는 소위 "깡통주택"이 널부러져 있다.

한때는 다가구주택이 정부의 권장사항이었다.

주택보급을 늘리고 아파트값의 거품을 진정시키는 완충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실제 서민들의 보금자리로 각광받기도 했다.

그러한 주인들이 이제는 전세금반환청구소송에 걸려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
있다.

차액반환을 요구하는 조정신청에도 불려다닌다.

이들은 극심한 수치심에 치를 떨면서 정부의 조치들이 세입자위주라고
비난한다.

대표적인 예로 임대차보호법을 꼽는다.

세입자들은 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되돌려 주지 않을 경우 집은 경매로
넘어간다.

이 경우 집주인들은 앉아서 당할수 밖에 없다.

전국 26만동다가구주택 주민들은 대부분 이러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세들어 있는 1백22만가구의 세입자들도 연쇄적으로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야기됐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뒤늦게 인식, 다가구주택의 분할등기를 허용했지만
그 효과가 어떨지는 아직 예단키 어렵다.

또 한번 정책실기를 한 것이다.

장기저리융자나 세제감면등 보다 획기적인 후속조치가 불가피하다.

특히 정책당국자들은 다가구주택소유자들이 부동산투기가 아닌 호구지책으로
세를 놓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 박영배 사회2부장 youngba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8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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