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 경제평론가. 소설가 >

아무리 간단하게 보여도 생태계는 매우 복잡하고 여린 것이다.

그래서 그것의 한 부분이 충격을 받으면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부분일지라도
그 영향은 널리 퍼진다.

충격을 받은 부분이 생태계의 지배적 종이라면 당연히 생태계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경제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생태계다.

그래서 미국 생물학자 마스턴 베이츠의 통찰대로 "경제학은 사람의 생태학
이라 할 수 있고 생태학은 자연의 경제 연구라 할 수 있다"(Economics can
be thought of as the ecology of man, ecology as the study of the
economy of nature)(베이츠의 통찰에 담긴 함언들 가운데 하나는 생태학자들
이 생태계를 살필 때 품는 경외감으로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라는 생태계에서 지배적 종은 재벌이다.

자연히 재벌에 생긴 변화는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 김대중 정권은 재벌을 개혁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

정권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런 개혁은
아주 근본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아예 재벌을 해체하자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그런 사정에서 물음 둘이 나온다.

하나는 "재벌이 강제로 제거되면 한국 경제에서 무엇이 지배적 종이 될까"
이다.

다른 하나는 "그 새로운 지배적 종은 재벌보다 나을까"이다.

첫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실은 진지한 논의조차 없었다.

둘째 물음에 대해선 재벌의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론 긍정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첫 물음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긍정적 대답은
논리적 근거가 약할 수밖에 없다.

어떤 종이 한 생태계의 지배적 종이 됐다는 사실은 그 종이 그 생태계에
아주 잘 적응했음을 가리킨다.

이 얘기는 재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다각화된 기업군인 재벌은
실제로 우리 경제에서 매우 효율적인 기업 형태다.

재벌을 효율적 기업 형태로 만든 근본적 요인은 우리 경제에선 정부의
영향력이 줄곧 압도적이었다는 사정이다.

그런 사정은 필연적으로 "정경 유착"을 낳는데 몸집이 큰 기업은 뇌물로
쓸 비밀 자금을 마련하는 일에서나 특혜를 활용하는 데서나 유리하다.

아울러 기업의 성장과 유휴 인력의 재배치를 위해선 다각화가 필요하다는
점, "정경 유착"의 비밀을 지키는 데는 혈연관계로 맺어진 집단이 유리하다는
점, 자본 시장의 원시성, 높은 거래비용 따위의 요인들은 재벌을 효율적
기업 형태로 만드는 데 거들었다.

그리고 재벌은 대체로 잘 움직였다.

정부가 수출을 지향한 경제 정책을 주로 재벌에 의존하면서 추진해왔고
직장인들이 재벌 회사들에 다니기를 바라며, 소비자들이 재벌이 만든 제품
들을 선호하고, 금융 기관들이 재벌에 돈을 빌려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은 이
점을 또렷이 보여준다.

물론 재벌은 개혁돼야 한다.

그냥 존속하기엔 그것은 너무 큰 결점들을 여럿 가졌다.

그러나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지배적 종이라는 사정은 그것의 개혁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함을 가리킨다.

그래서 직접 재벌을 수술하기보다는 생태계의 조건들을 바꾸고서 재벌이
스스로 바뀌거나 다른 기업 형태에 밀려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온당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지배적 종을 대안없이 해치지 않으면서
새로운 지배적 종이 나오도록 할수 있다.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제안에 대해 너무 겁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벌을 해체하자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베이츠가 우림(rain
forest)에 대해서 한 얘기를 떠올리게 된다.

우림은 하도 장엄해서 대성당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우림을 베어내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관목들과 덩굴 식물들로
이루어져 사람들이 다닐 수 없는 밀림(jungle)이다.

재벌을 장엄한 우림에 비길 수야 없고 재벌을 대신할 기업 형태가 꼭 밀림과
같을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위에서 얘기한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암시하는 듯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