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요즘은 그동안 집안에
처박아 놨던 회사 뱃지를 달고 다녀요"

경기도 평택의 금형전문업체 신라엔지니어링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다.

그가 회사에 대해 갑자기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월급이 갑자기 많아져서도 아니고 놀라운 기술을 개발해서도 아니다.

한 시중은행 평택지점이 무담보로 20억원을 대출해 준 것이 근로자들의
사기를 올린 유일한 이유라는게 이 회사 경영자들의 말이다.

창업이후 담보없이 신용대출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이 기술력과 앞으로의 전망만으로 신용대출을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그렇다.

이런 금융환경을 감안하면 이 근로자의 반응이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엔지니어링의 경우를 꺼낸 것은 외환위기이후 침체됐던 창업열기가
지난해 말부터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지만 이들을 둘러싼 금융환경은 과연
변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였다.

올들어 2주동안 서울과 지방 5개 광역시에서 새로 문을 연 기업은 1천3개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9%나 늘어났다.

창업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경제를 이끄는 주역은 기업이다.

창업은 대부분의 경우 중소기업형태다.

마이크로소프트나 GE같은 세계적인 기업도 그 출발은 중소기업이었다.

창업은 고용을 창출한다.

실업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창업은 실업자를 흡수
하는 스폰지 역할을 한다.

창업숫자는 그래서 한 나라의 경제력을 가늠하는 주요지표중의 하나이고
최근의 창업열기는 고무적인 것이다.

그러나 창업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문을 연 기업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창업한 기업중 5년내 문을 닫는 비율이 90%에 이른다는 분석이 있다.

치열한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생리상 생성과 소멸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많은 업체가 쓰러진다면 낭비다.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키우는 것은 낭비를 줄이는 일이다.

창업기업을 키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금융환경의 정비다.

원활한 금융의 역할은 새싹에게 가장 중요한 수분의 그것과 같다.

벤처기업을 창업한 서울대 이면우 교수가 자신의 경험담에서 밝힌 것처럼
벤처캐피털이 갓 창업한 벤처기업을 실적이 없다고 외면하는한 새로운
기업이 뿌리를 내리기는 어렵다.

담보와 대차대조표상의 경영지표가 은행대출을 결정하는 기준의 전부여서는
한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스타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렵다.

신라엔지니어링의 경우는 우리의 금융환경에서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더욱 반갑게 들린다.

기업이 갖고 있는 기술력, 제품의 시장성, 성장잠재력 등등.

서류로 나타나기 힘든 기업의 힘을 알아내는 금융기관의 눈이 있어야 한다.

물론 기술을 평가해서 담보를 제공하는 기관이 있기는 하다.

기술신용보증기금이 그렇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흙속의 진주"를 모두 찾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라엔지니어링의 경우가 그렇다.

시중은행 평택지점 관계자들의 과감한 결정이 없었다면 조그만 금형업체
하나가 부도명단에 추가됐을 것이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이유다.

금융기관의 신용대출 확충, 거래기업의 잠재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심사기법의 개발 등이 그래서 필요하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창업열기도 때맞춰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의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들어 낼 금융환경의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지기
를 기대한다.

김형수 < 산업2부장 odi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