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경제청문회 개최를 위한 국정조사계획서를 불과
30여초 만에 기습 처리했다.

전날과 전전날 민생.규제개혁 관련법안들을 무더기 변칙통과 시킨데 이어
"연3일 날치기"를 강행, 헌정사 초유의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

의사당을 빠져 나가는 여당의원 대부분은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민생법안의 제때 처리보다는 비리혐의로 체포동의안이 발부돼 있는 소속
의원들을 보호하는데 더 주력하는 듯한 모습만 보였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고 과거 자신들도 했던 일을 놓고
한나라당은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폭거"라고 규정했다.

뒤이어 마치 "민주화 투사"라도 된 듯 본회의장에서 철야 농성도 벌였다.

다음날인 8일엔 야당총재와 1백여명의 의원들이 청와대 앞길에서 과거에도
거의 없었던 이례적인 데모를 했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정치에 환멸을 느껴 의원직을 내놓겠다는 의원도
없지 않다.

각자 할말이 있겠지만 정치권의 이같은 행태 모두 국민들에겐 "우습게"
보이고 있다.

위 아래 구분없이 모두 "싹쓸이" 해야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극언도 나온다.

특히 통과된 법안에 대한 정부측 대응태도는 국민을 정말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규제개혁위에서는 상당수 법안들의 내용이 변질됐다며 문제를 제기했고
청와대측은 대통령의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여권은 법안을 제출하기 전에 당정회의를 거쳤었다.

또 국회에선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의원들이 제출부처와 협의해
법안을 확정했다.

여권이 처리한 법안을 스스로 거부하겠다니 코메디도 이만저만한 코메디가
아니다.

왜 날치기까지 동원했던가.

개정법에 문제가 있다면 정부내에서 다시 조정, 임시국회에서 재개정할
일이다.

중추신경이 마비돼 몸통과 사지가 제각각으로 노는 형국이다.

국정운영이 삐거덕 거리고 있지만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국민들은
헷갈리기만 할 뿐이다.

IMF 관리체제로 국민과 기업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우리 정치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칭찬할 것이야 없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여야간에 대화가 있었다.

어느 정도 "상식"도 통했었다.

이제는 아예 상대방을 안중에 두지않는 "막가파 식"이 됐다.

게임의 룰 조차 실종됐다.

경제에 걸림돌이 될 뿐만아니라 지역갈등을 증폭시키는 등 국민들에게
장래에 대한 희망을 걸 수 없게 만들었던 과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환골탈태해도 부족한게 우리의 주변 여건이다.

여권은 그러나 타도대상으로 삼았던 역대 정권의 "못된 짓"만 골라 배웠다
는 비난을 받을 정도가 됐다.

야당도 과거의 "무책임한 야당"을 닮아가고 있다.

국정조사계획서 처리관련 국회속기록에는 "이의없다"는 말만 기록돼 있다.

이날 현장 취재 중이던 1백여명의 기자들 대다수는 "이의 있다"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고함소리를 들었다고들 한다.

조사계획서 처리의 적법성 문제를 논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선진외국에서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이같은 "비정상"을 문제삼는 자체가
우리에겐 오히려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정치의 위기의 한 단면이 아닐까.

세계 어디에서건 소수파(minority)가 정권을 잡으면 정보.공작정치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그에 따른 해악은 필연이다.

일제시대나 역대 군사정권 시절을 되돌아 보면 자명해 진다.

민주화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노태우 김영삼 정권때도 정치사찰은
이어졌다.

국민 절반 이상이 집권을 원치 않았던 "소수파"였기에 반대진영의 움직임을
체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사로 "문민정부"니 "세계화"니 하는 구호가 난무할 수 밖에
없었다.

"국민의 정부"도 국민 절반 미만의 지지로 출범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정치사찰이나 고문 문제에 접근하는데 있어 "정파적"
이해를 벗어나야 한다는 세간의 지적은 바로 이같은 과거의 "아픈 경험"에서
우러난 충정이라는 점을 새겨야 할 것 같다.

정권에 부담이 될 수 있는 정치적 사안의 본질을 덮기 위해 "정략적"인
차원에서 정국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는지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특정지역 편중이라는 오해를 살 인사가 진행되는지도 점검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역.계층간 갈등을 뛰어넘지 못하고서는 21세기를 향한 재도약도 우리의
미래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 jhpar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