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

박정희 군사정부 출범 전후에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순서인
것 같다.

이미 밝힌대로 나는 산업개발위원회에서 5개년계획 작성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때 이미 5개년계획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고 장면 총리가 천명한 대로 62년
1월부터 계획을 집행하기 위한 준비에 주력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문제는 재원이었다.

아무리 미국에서 국토건설사업 추가원조를 받는다 해도 돈은 태부족이었다.

게다가 재정안정의 틀도 견지해야 했다.

당시 계획작성을 맡은 관계자들은 일본이 발표한 "소득 배증 장기계획"을
많이 참고했다.

일본 이케다 총리는 이에 앞서 60년부터 10년내에 현 소득의 2배 수준 달성
을 목표로 한 연 7.2%의 고도 성장 계획을 내놓았었다.

"소득 배증"이란 참 매력적인 표현이어서 산업개발위원회에서도 이 내용을
열심히 검토했다.

목표로 했던 성장률 5.6%를 일본처럼 7.2%로 높이는 방안을 면밀히 따져본
것이다.

결국 가용재원 태부족으로 성장률 상향 조정은 포기했다.

5월16일 새벽.

라디오를 듣고 있던 나는 난데없는 방송을 듣게 됐다.

혁명공약이 흘러나왔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앞날이 불안했다.

4.19 때는 내가 직.간접적으로 참가했고 부패정권은 타도돼야 한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5.16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다만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5개년 계획은 그대로 추진될 것이란 믿음은 갖고
있었다.

5.16은 4.19와 전혀 달랐다.

전국 계엄령과 "언론 완전 통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의 스피드가 달랐다.

하루에도 포고령과 새 법령이 몇개씩 쏟아져 나왔다.

5월이 지나가기 전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다시 5개년 계획을 세운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작성멤버는 김성범 백용찬 정소영 등 3명이라고 했다.

김성범 백용찬 등은 산업개발위원회 동료였음으로 안심이 됐지만 또 무슨
"5개년 계획"인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곧 이어 부흥부가 폐지되고 건설부가 신설됐다.

지금까지 부흥부 부설 기구였던 산업개발위원회는 건설부에 통합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산업개발위원회 직원중 파견근무자는 자기직장으로 "원대복귀"했다.

(이 때 산업개발위원회 구성원인 위원 보좌위원중 절반 이상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그리고 대학에서 파견돼 있었다)

1개월여 지난 7월22일 건설부는 또 경제기획원으로 탈바꿈했다.

이 경제기획원 신설구상은 이미 내가 언급한 대로 장면 정권 당시 민간경제
인들이 종합경제회의에서 대정부 건의안 내용을 그대로 법제화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7월6일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이 발표됐다.

아무리 군사정부라고 하지만 착수한지 1개월 남짓한데 어떻게 새로운 5개년
계획을 짤 수 있었을까.

당시 관계자들은 내놓고 말하길 꺼렸지만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민주당 시절의 5개년 계획에서 목표성장률을 대폭 높이고 이에 따른 계수
조정을 해서 맞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는 당시 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유원식씨의 "회고록"
(정경문화 1983.10)에도 잘 나타나있는 사실이다.

유원식(당시 대령)씨는 쿠데타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정치는
박 부의장께서 맡으시고 경제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했다는 주인공
이다.

회고록엔 이렇게 돼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고 내가 상공분과위원장을
맡은 날부터 나는 제1차 5개년 계획 작성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작성하기 위해 종합경제재건기획위원회라는 긴 이름을 가진 기구를 만들어
내 사무실 옆에 위치하게 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처음 박정희 의장에게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작성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박 장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무엇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3천만 국민이 각자 자기의 위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라고 설명했다. 각자 자기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안정과 성장이 이룩될 것이라고 알기 쉽게 얘기했다"

유원식씨는 알기 쉽게 얘기했다지만 지금 읽어봐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알쏭달쏭하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완전 고용의 꿈을 꾸었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유씨는 그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스칼라피노 박사에게 위와 같은 식으로
자기 의견을 말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군사정부에 사회주의 경제학자가 있더라"라고 스칼라피노
박사가 미 정부에 보고했다는 소문이 돌만 했다.

드디어 산업개발위원회는 해산되고 필자도 신설된 최고회의 종합경제재건
기획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전속됐다.

자리만 옮겼지 어수선하고 과제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산업개발위원회에서 하려고 했던 5개년 계획 1차연도 시행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기 위해 스스로 과제를 정했다.

11월께 내각수반에 직속되는 "내각 기획통제관실"에서 "기획조정관"으로
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국가의 행정.경제운영을 총괄할 수 있는 자리였다.

< 전 전경련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