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 < 고려대 교수 / 경제학 >

앞으로 3~4년을 내다 본다면 한국경제는 어떤 변화와 역경을 겪으면서
발전해 다시 안정된 기반의 성장궤도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 경제가 겪고있는 침체로부터 벗어나려면 우리는 무슨 과제부터
풀어가야 할 것인가.

금년에는 구조조정 추진과 실업 해소를 위한 경기진작이라는 두 상충되는
정책을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지난 40여년동안 성장과 발전을 뒷받침했던 우리 나름대로
의 제도를 버리고 모든 부문에서 서구식 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것도 과제이
다.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그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경제가 글로벌 경제에 통합되면서 불확실성.불안정성이
증폭될 것인데 이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비젼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아 스스로 장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경제는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경기회복 속도가 느리고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직자가 양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인해 이제는 적극적으로 경기를 부양해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이를 반영해 정부도 경기진작과 병행해 구조개혁을 내실화할 운영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병행정책은 단기적으로 별다른 경기진작 효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오히려 구조조정 노력을 지연 내지 약화시켜 장기적으로는 경제
활성화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지금 5대재벌이 중복.과잉 투자를 정리하지 못해 허덕이고 있고, 77개의
대기업과 중견기업에 대한 "워크아웃"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출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금융비용이 하락한다고 하더라도
기업의 설비투자 의욕이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업대책으로는 경기부양보다 실업자들의 생계보호강화와 직업훈련제도를
내실화하는 등 기존대책을 보완하는 노력이 좀 더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미 금리 하락으로 퇴출됐어야 할 부실기업들이 소생하고 있고 경쟁력이
취약한 기업들이 구조조정의 고통을 비켜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결국 중복.과잉된 사업과 수익성 없는 투자를 조정하라고 강요하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투자를 유도하려는 이중적인 정책은 설득력을
잃게 돼 다시 외국인들의 불신만 깊게 할 우려가 있다.

이 때문에 정책당국은 어느정도로 부실한 기업과 금융기관을 정리할 것인지,
그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맞추어 경기진작의 강도를 조정해야 할
것이다.

부실기업과 부실채권의 정리, 고용관행의 개선 등 구조개혁은 한국경제가
다시 정상궤도로 복귀하기 위해 선결하여야 할 과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선뜻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를들어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금융 부문에서 도입되고 있는 서구식
시스템이 우리 경제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인지, 정착된다면 경제의
기반을 튼튼하게 할 것인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개방된 시장제도에 경제운영을 맡기고 있으면 환란도 예방하고 성장도
적정수준으로 회복될 것인지 미덥지가 않은 것이다.

사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지도 않다.

지난 10여년 동안 계속해서 시장의 자유화와 개방을 추구해 왔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정부가 직접 간여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지금 산더미같은
부채에 억눌려 있고 중복.과잉 투자에 허덕이고 있다.

금융 자율화와 개방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들은 위험을 무시한채
무리하게 자산을 운영하다가 부실화돼 환란을 자초하지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경제개방으로 글로벌 경제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말로만 듣던
세계주의의 문제점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예상했던 대로 자본시장 개방으로 정책운영의 자주성.독립성을 잃어가고
있다.

거시정책 수단도 약화될 대로 약화됐다.

주가 환율 금리 등의 가격변수를 조절하기 어렵게 돼 저축의 가치를 방어
하기 어려워졌다.

기업인들은 제대로 사업을 계획하지 못하고 있다.

계층간.부문간 소득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특히 글로벌 경제에 참여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과 국내경제를
생활기반으로 하는 농어민 영세상공인 단순 근로자들과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더구나 이들 취약부문 종사자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정부는 이들을 돌보기 위해 사회보험을 확충해야 하겠으나 지원에 필요한
재원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우리에게 개방이란 지리적인 여건과 역사적 배경의 특수성으로 보아 중국
이나 일본 혹은 두나라와의 경제적인 통합을 의미한다.

즉 삼품과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말한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아무도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에 흡인되기를 원치도
않고, 또한 흡인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중.일과의 통합의 추세를 슬기롭게 수용하면서 우리 나름대로의
경제.정치적 자주성을 지켜 나가는 것이 개방의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러면 서구식 제도의 도입과 시장원리에 따른 경제운영에 대한 회의와
불안을 불식해 재도약의 자신을 가지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정부의 역할이 보수나 진보 어느 쪽의 이념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정부는 과거의 지나친 간여나 규제에 집착해서는 안되지만 시장참여자들의
행동 "룰"이나 정하고 이를 시행하는 "작은 정부"의 논리에 치우쳐도 안된다.

필요하다면 자본유입 규제도,독과점 규제도 있어야 하며 인력 및 연구개발
에 대한 지원을 서슴치 말아야 한다.

경제주체의 하나로서 정부는 민간부분에 군림하는 과거의 관행을 버리고
민간부문과의 분업과 팀웍을 강조하는 협조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시장의 결함을 보완하는 정부의 역할이 바로 요즈음 유행하는
"제3의 대안"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우리에게 경쟁면에서의 우위가 있다면 그것은 우수한 인적자본과 기술개발
능력일 것이다.

따라서 둘째 과제는 모든 사람들이 글로벌 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결국 교육과 인력개발 기술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이런 공공적인 성격의 투자는 정부와 기업이 서로 협조해 그 규모를 늘려
가야 할 것이다.

셋째, 경제와 사회의 개방으로 사회의 응집력이 약화되는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사회적인 결속을 다지려면 라이커(Reich) 교수가 주장
하는 건설적인 "경제 민족주의"를 우리도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즉 한국민으로서의 연대성, 문화.역사적인 유대성, 국가적인 목적의식이
강조되는 경제 민족주의를 기치로 국민적 단결을 유도해야 한다.

특히 글로벌 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선택된 사람들은 국내에 뒤쳐지게
되는 계층과 부문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전통을 세워야 할 것이다.

결국 교육의 문제요,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쉽을 기대해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협졍(NAFTA)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며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동북아의 협력기구 설립도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결국 우리 스스로 민주적이며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교역국가로서의 위치를
분명히 해 독자적으로 세계경제의 풍랑을 이겨내야 한다.

만일 우리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을 경우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사회가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고,
그 첫단계로서 국제기구를 통해 지역적인 분쟁해소 난민구제 환경보호
후진국 개발 등에 우리의 능력 범위 내에서 적극 참여하는 세계주의를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