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00년 1월 1일 아침, 나는 두 통의 인터넷 메일을 받았다.

하나는 일년 전에 헤어진 미나로부터의 메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외국인
투자회사에서 보내온 입사 합격 통지서였다.

믿어지지 않는 두 통의 메일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 읽고 나서 나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난 2년 동안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나를 괴롭혀온 두 가지 문제가
하루 아침에 해결됐으니 어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으랴.

1998년 가을, 다니던 은행에서 정리해고된 직후에 나는 미나와 헤어졌다.

나는 해고를 잠정적인 문제로 받아들였지만 그녀는 냉혹한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리 해고 대상에서 제외되어 살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셈인지 내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훨씬 심각하게 걱정하곤 했다.

간단히 말해 장래를 점칠 수 없게 된 남자와의 교제가 사뭇 난감하게
여겨진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떠나라" 하고 나는 그녀에게 짧게 잘라 말했다.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999년은 나에게 지옥 같은 1년이었다.

실직과 실연의 이중고를 짊어지고 나는 참으로 많은 것들과 이를 악물고
싸웠다.

나 자신에게마저 패배하면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아침마다 10km씩
조깅을 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영어회화와 전공 분야의 서적에다 죽어라고
머리를 처박았다.

언젠가 이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할 때,그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자세로
당당하게 세상으로 진입할 거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현실을 견뎌낸
것이었다.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나는 다시 한번 입사 통지서를 읽어보았다.

1월 5일부터 출근을 하라고 그곳에는 명시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전 은행에서의 근무 경력을 인정하여 경력 사원으로 대우
하겠다는 말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더이상 무엇을 바라랴. 미나의 메일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상대방의 장래나 현실보다 더욱 중요한 게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 지난1년
동안 자신이 확인한 것은 오직 그것 한 가지뿐이라고 그녀는 쓰고 있었다.

그래서 2000년대가 시작되는 지금,깊이 참회하는 기분으로 그녀는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용서한다면 부디 전화를 해 달라고 간절한
어투로 메일을 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 IMF 정리 체제 본격 가동"

텔레비전의 아침 뉴스를 들으며 나는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 동안 온몸에서 이상한 허물이 벗겨져내리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온몸에 덮여 있던 불유쾌한 허물이 벗겨지고 비로소 매끄러운
맨살의 감촉이 느껴진 것이었다.

잠시 거울에 비친 알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신선한 과즙 터지듯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밀려나왔다.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미나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인가,나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도 그녀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A&D 회사에 경력 사원으로 입사하게 됐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회사 이름을 듣자마자 "정말?..." 하고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음, 정말이야. 내가 그런 거짓말 하지 않을 사람이란 거 알잖아?"

"그럼 내가 축하해 줘도 돼? 할 수만 있다면..오늘 당장이라도 근사한
곳에서 축하주를 사고 싶은데..나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하고 말고가 어딨어. 모두에게 어려운 시절이었으니까, 그걸 경험삼아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거지 뭐. 안 그래?"

"그래, 정말 고마워. 그럼 오늘 바로 만나."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나서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6시 30분, 파라다이스 광장, 해피 투게더 코너.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컴퓨터 통신에 접속하고,꽃배달 주문 코너로 들어가
장미 1백송이를 주문했다.

미나와 만나기로 한 시간과 장소, 그녀의 이름을 알려준 뒤에 신용카드로
대금 결제를 했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마당, 가능하면 그 첫번째를 근사하게 장식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녁 6시, 근 1년만에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고 나는 파라다이스 광장으로
나갔다.

그곳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시내 중심가의 지하 광장이었다.

광장의 중심부에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별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그곳
을 중심으로 36개의 코너가 만들어져 각자의 취향에 따라 공간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느긋한 기분으로 분수가 설치되어 있는 해피 투게더 코너로 갔다.

6시 25분, 아직 미나는 그곳에 나와 있지 않았다.

흡연 구역의 유리방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알루미늄
제복 차림의 보안 요원 두 명이 해피 투게더 코너로 들어왔다.

전자 검색기를 손에 든 그들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곧장 흡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에게 담배를 끄고 신분 카드를 제시하라고 명령했다.

무슨 일이냐고,사뭇 불쾌한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그러자 둘 중 하나가 거의 기계적인 음성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통신 판매회사에서 사용한 대금 결제 카드에 문제가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제시하라"

"카드 결제라면..꽃 배달?"

미나에게 전해 주라고 주문한 장미 1백송이를 떠올리며 나는 되물었다.

나의 되물음에 보안 요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짜증스런 놈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갑에서 신분 카드를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전자 검색기를 손에 든 보안 요원이 그것을 건네받아 검색기에다
밀어넣었다.

그러자 2,3초도 지나지 않아 붉은 램프가 점멸하며 띠띠띠띠, 하는 경고음이
연해 울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보안 요원들이 내 손에다 검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전자 수갑을
채웠다.

보안 요원들에게 이끌려 해피 투게더 코너를 벗어날 때, 얼핏 광장 중심부
에 한 여자가 장미꽃 다발을 가슴에 안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미나였다.

나는 미친 듯 몸을 뒤틀어대며 뭔가 잘못된 거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쪽에서 나를 사로잡은 그들의 완력에 이끌려 미나와 정반대 방향,
다시 말해 아무도 가지 않는 36번째 코너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광장 중심부에 선 채로 미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파라다이스 광장의 36번째 코너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었다.

오직 대형 엘리베이터의 승강구가 있었고,그 상단에는 "아웃 코너"라는
붉은 전광판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작동 버튼을 눌러놓고 나서 보안 요원 중 하나가 어디로인가
무전 연락을 했다.

"투척 준비 완료.."

곧이어 승강구가 열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가,내부에는 승강기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돌리려 할 때 두 명의 보안 요원이 동시에 나를
승강구 안으로 밀어넣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의 끝없는 추락. 여기가 어딘가.

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리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빈틈없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끔찍스런 악몽을 되새길 겨를도 없이,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전화기의 자동 응답기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음성을 들어야 했다.

몇 번인가 들어본 적 있는 음성의 소유자가 자동 응답기에다 메시지를
남기는 중이었다.

사내의 음성을 들으며 나는 물끄러미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내의 음성이 마치 서기 2000년의 꿈속에서 나를 퇴출시킨 보안 요원의
음성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졌다.

"김민석씨, 1999년이 밝았습니다. 새해 첫날부터 이런 전화 드려서
미안한데, 새해 첫날 쉬지도 못하고 이런 전화 하는 제 심정은 오죽하겠
습니까. 정리해고된 처지라는 건 알고 있지만, 김민석씨 같은 카드 대금
연체자들을 처리해야 저도 살 수 있다는 거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아무튼
새해도 밝고 했으니 복 많이 받으시고,내일 중으로 저에게 전화 좀 해
주세요. 우리 서로 좋은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에서 메시지를
남깁니다. 해피 투게더, 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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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우 <소설가> 약력 ]

<> 1958년 경기 광주 출생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 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독산동 천사의 시" "호텔 캘리포니아" 등
출간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