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31일 자정.

새 밀레니엄의 첫 해가 뜨는 뉴질랜드 피트섬.

뜻깊은 새로운 천년의 일출을 즐기면서 친구들과 함께 축배를 들고 있는
순간 모든 것은 암흑의 도가니로 돌변한다.

전력회사의 컴퓨터시스템에 밀레니엄버그가 달라붙어 전력공급이 끊어진
것이다.

칠흑같은 축제장엔 몇초후 미사일이 날아든다.

우즈베키스탄 어딘가의 격납고에 보관된 대륙간탄도탄(ICBM)의 발사시스템이
갑작스레 작동돼 버린 것이다.

미국 국방부는 위성추적 미사일을 통해 요격에 나서지만 제대로 움직여줄지
아무도 모른다.

컴퓨터가 몰고 오는 밀레니엄버그 문제다.

이 문제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일단의 영국 여행객들이 미국을 방문해 렌터카회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운전면허증의 유효기간은 2000년 이후였다.

차를 빌리려던 여행객들은 렌터카회사의 컴퓨터에 의해 보기 좋게 거부
당하고 말았다.

또 미국 캔자스주의 1백4세 노파가 유치원 입학통지서를 받았는가 하면
비자카드사에선 2000년 이후에 만료되는 카드 일부를 폐기하기도 했다.

모두 컴퓨터가 2000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일어나는 일들이다.

2000년이 오면 컴퓨터는 1900년이나 1980년 등으로 받아들인다.

때에 따라서는 작동 자체를 멈춰 버린다.

그나마 일반가정의 PC는 별 문제가 없다지만 그렇지도 않다.

컴퓨터 날짜를 올해말로 맞춰 놓고 몇분 후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실험
하다 응용프로그램이 망가질 수도 있다.

시한이 설정된 프로그램도 있기 때문이다.


<> 금융 =금융기관의 계정계 시스템이 갑자기 미쳐버린다.

갓 태어난 아이가 연금수령자로 둔갑하는가 하면 예금통장에 1백년동안의
이자가 한꺼번에 들어온다.

거꾸로 은행계좌에서 대출금의 몇배나 되는 대출이자가 빠져 나가기도 한다.

증권거래 시스템도 작동이 중단돼 새 천년의 첫 주식거래에 나서려는
투자자들을 실망시킨다.

통신회사의 요금청구시스템도 버그가 갉아먹어 1백년치에 해당하는 통신
요금을 내라는 통지서가 날아든다.


<> 전기 =전력회사의 제어시스템이 망가져 전력공급이 끊긴다.

곳곳에서 정전사태를 맞는다.

냉동고에 든 음식물들이 녹아내린다.

원자력발전소에선 긴급 비상경보 사이렌이 울린다.

핵발전 장치의 시설통제시스템에도 금이 간다.

엄청난 방사능 누출사태가 벌어지거나 시스템이 복구될 때까지 발전이
중단된다.


<> 병원 =최악의 시나리오라면 중환자들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초침이 2000년을 알리는 순간 정맥주사 장치나 X레이장치, 심장박동 모니터
등 병원의 의료시스템이 말을 듣지 않는다.

병력기록이 엉터리로 만들어지고 원무과의 진료대금 청구서에도 터무니없는
병원비가 찍힌다.


<> 항공 =항공기 자체의 운항시스템보다도 관제시스템이 문제다.

관제탑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버그가 퇴치되지 않았다면 작동이 안된다.

10여시간을 날아온 비행기가 착륙신호를 보내지만 관제시스템은 이를 인식
하지 못한다.

왔던 항로로 되돌아 가자니 휘발유가 부족하다.

인근 비행장에 비상착륙하려 하지만 사정은 마찬가지다.


<> 공장 =멀쩡하던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제대로 작동되는 공정에선 부품을 끼우느라 하릴없이 돌아가지만 앞뒤
공정의 손발이 맞지 않아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돌변한다.

그나마 자기회사의 컴퓨터에 든 버그를 완전 퇴치했다 치더라도 부품을
공급해온 협력업체의 컴퓨터 문제로 제대로 공장을 돌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 국방 =첨단 미사일장비가 한낱 고철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

지구궤도를 돌며 정찰업무를 맡았던 위성이 일순간 실종된다.

전자거래를 통해 부품을 조달하는 프로그램도 망가져 1만원짜리 부품을
1억원에 주문을 내는 해프닝도 다반사다.


<> 윤년 =2000년엔 2월29일이 있지만 컴퓨터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월단위로 결산하는 대부분의 시스템에선 2월28일이 끝나면서 결산작업을
시작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도 벌어진다.

금융기관의 이자계산도 흐트러지게 된다.

컴퓨터의 역사가 짧아 대부분의 컴퓨터가 윤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년이 3백65.25일이라면 4년마다 윤년을 인식토록 하면 된다.

그러나 정확히는 3백65.24129일이다.

때문에 4년마다 윤년을 넣되 1백년 단위로 윤년에서 빠진다.

이중 4백년마다 다시 윤년을 집어넣어야 하지만 컴퓨터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년이었던 지난 96년 호주 태즈매니어의 알루미늄제련소에선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그해 12월30일을 넘기자 컴퓨터에선 31일을 모른채 다음해로 넘어가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약 1백만파운드나 들여야 했다.

전세계 컴퓨터들이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대반란이다.

밀레니엄버그가 가져올 카오스(혼돈)상태다.

"이 반란세력을 연내에 철저히 제거하라"는 것이 전세계 프로그래머들에게
내려진 새해 최종특명이다.

< 손희식 기자 hssoh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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