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년을 색채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일까.

그것은 아마도 칠흑같은 밤의 색깔일 것이다.

온 국민이 어둠속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기 위해 발버둥친 한해였다.

DJ정부는 출범하자마자 IMF의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

또 실업과 구조조정 빅딜 등으로 직장인들은 목을 움츠려야만 했다.

북풍 총풍 세풍의 3풍이 정치권을 어지렵혔다.

냉소와 미소, 풍자와 야유가 엇갈렸던 98년.

인고의 미학으로 버텨온 올해 쏟아진 말들을 반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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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아래서 지낸 온 98년은 수많은 신조어와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지난 1년간 우리는 IMF라는 영어 단어와 함께 숨쉬고 생활해 왔다.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로 많은 사람들이 정들었던 직장을 떠나며 "I am
fired(난 해고됐다)"와 "I am finished(난 끝났다)"를 외쳤다.

반대로 해고되지 않은 사람들은 "I am fine(난 괜찮아)"을 조용히 토해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IMF라는 단어가 지겨워질 만큼 모든 분야에서 애용(?)되자 이번에는
"I am fed up(지겨워)"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난에 대한 위기감도 잠깐 한달이 멀다하고 오르던 휘발유값이
주춤하면서 거리에 차들이 다시 늘어나자 이 단어의 해석은 "I am
forgetting (난 잊었어)"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IMF체제는 근검절약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오기도 했다.

현대판 국채보상운동으로 불리우는 "금모으기 운동"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졌다.

국민들은 소중히 간직해왔던 가락지를 빼 놓으며 경제난 극복 의지를
다졌다.

"아나바다 운동"도 번졌다.

모든 물건을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는 이 운동은 잊었던
검약정신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경쟁력을 상실하고 사라지는 기업과 직장인들이 늘어나자 "구조조정"과
"퇴출"이란 단어는 모든 실생활에 적용되는 유행어가 됐다.

"명퇴(명예퇴직)" "황퇴(황당하게 당한 퇴직)"는 어린아이들도 익숙할
정도의 일상용어가 됐다.

입사시험에 갓 합격한 대졸예정자들이 입사도 하기 전에 정리해고 당하는
경우는 명태보다 조금 작은 물고기 이름에서 따온 "노가리퇴"로 빗대어졌다.

정리해고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살생부"가 등장하면서 "신토불이"라는
말은 몸과 땅이 하나로 될 정도로 엎드린다는 의미로 변질됐다.

여성들이 정리되는 비율이 월등히 높자 "남존여비"는 남자는 살고 여자는
실직의 슬픔을 겪는다는 뜻으로 통용됐다.

또 복지부동은 "복지뇌동"으로 탈바꿈 했다.

튀지 않게 납작하게 엎드려서도 머리는 열심히 굴려야 난세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대학졸업생의 취업이 힘들어지자 대학가에는 OO족 시리즈가 유행했다.

졸업을 미루거나 학업을 마친 후에도 부모에 의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은 "캥거루족" 또는 경제용어를 빌려 "모라토리엄
(지불유예) 인간"이라 불렸다.

취업의 빙하기를 견디다 못해 아예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수면하에서
지내는 학생들은 "잠수족"으로 통했다.

여학생들은 "해녀족"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또 유학을 갔거나 유학준비를 하다가 환율폭등으로 중도하차한 "U턴족"들도
있었다.

실직과 관련, 이를 풍자하는 유머도 나돌았다.

올 겨울에는 매년 어린이들을 찾아오던 산타클로스가 오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를 들어보면 첫째 루돌프가 정리해고 당했기 때문.

둘째 나이 든 산타클로스가 젊은 산타한테 밀려 명퇴당했다.

셋째 낮은 급여에 불만을 품은 루돌프가 썰매에 불을 질렀다.

넷째 임금이 싼 중국 산타클로스 한테 밀려서 등이다.

경제상황이 점차 악화되면서 기업들이 연쇄도산한데 이어 "소비자 파산"이
등장했다.

또 생계곤란을 이기지 못해 저지르는 "장발장형" "보릿고개형" 범죄와
"노숙자"들이 사회문제가 됐다.

이렇게 주변상황이 어수선해지면서 차라리 세상돌아가는걸 모르고 지냈으면
하는 바램이 싹텄고 급기야는 "사오정시리즈"가 나왔다.

사오정은 어린이 만화에 나오는 약간은 귀가 어두운 주인공.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말로 결론을 내리는데서 국민들은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정치권과 관련해서는 "총풍"이니 "세풍"하는 바람류가 가장 많은 지면을
장식했다.

또 "햇볕정책"과 맡물려 "금강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어느때보다도
고조된 한해였다.

일부 교사들의 불법과외 알선 등으로 교권이 땅에 떨어지고 학부모들의
질책이 극에 달했다.

국정감사장에서는 "학교는 무너질판, 교장은 죽을판, 교감은 살얼음판,
선생은 이판사판, 학생은 개판, 교실은 난장판, 장학사는 닥달판, 학부형은
살판"이라고 교육계 8판을 내놓았다.

한알만 먹어도 고개숙인 남성의 기운을 찾아준다는 "비아그라"의 열풍은
곳곳에서 기사회생을 기원하는 단어로 응용됐다.

경찰의 추적을 번번히 따돌리는 신창원의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에 "경찰
인사는 신창원 손에 달렸다"는 말이 나돌았다.

경찰의 포위망을 5번이나 빠져 나가자 신창원에게 "5관왕"이라는 별호가
붙기도 했다.

부유층의 고질적인 병무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유전면제 무전입대"
라는 말의 의미를 서민들은 실감해야 했다.

광고카피도 다양한 유행어를 창조했다.

감원 바람에 몸서리 치던 직장인들에겐 "박카스"는 가장 무서운 단어로
다가왔다.

피로회복제 박카스 TV광고에서 청소부 아버지는 자신을 도와 새벽일 나온
아들에게 말을 건넨다.

"힘들지. 내일부터는 나오지마..."

직장인들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월드컵 16강의 염원에 들떠있던 시절에는 모 이동통신사의 "16강이 보여요"
라는 카피가 유행하면서 "보여요"라는 말은 희망을 담은 단어로 통용됐다.

이밖에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때마다 사람들은 "뭐, 이린기 다 있노"를
연발했고 "나 OO로 옮겼어" "무늬만 OO아니에요" "국물이, 국물이, 끝내
줘요" 등도 올 한해를 풍미했다.

이밖에 일부 중.고등학생들의 비뚤어진 생활상이 사회문제화 되자 학교생활
이 부모들의 관심을 끌었다.

자연히 학생들이 사용하는 속어들도 알려졌다.

대표적인 것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아이들을 칭하는 "왕따".

특히 왕따가 전교생으로부터 왕따 대우를 받으며 "전따"로 불린다.

가장 좋은 것, 최고를 지칭하는 "짱"이라는 단어도 중고등학생들 사이의
일상용어가 됐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는 "캡숑" 등도 애용됐다.

중학생들은 스스로를 "중딩"으로, 고등학생은 "고딩"으로 불렀다.

이말은 한 중학교 방송반에서 제작한 영화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가
유명세를 타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 장유택 기자 changy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