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출근길 라디오에서 한 주부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 주부는 남편과 부부싸움을 자주한다.

그래서 달력에 부부싸움을 한 날은 X표를 쳤다.

부부싸움을 한 후에는 내용별로 암호를 매기기도 했다.

지난 달력을 넘기며 한 해를 결산하던 주부는 달력위의 X표시를 보고
놀랐다.

싸움한 날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연말이 되면 누구나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에게 지난 1년은 악몽과 같은 한해였다.

IMF(국제통화기금)체제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연쇄도산, 구조조정, 정리해고, 실업대란, 연봉제 같은 말들에
길들여져야만 했다.

특히 거리로 내몰린 회사원이나 늘어나는 노숙자들로 충격이 컸던 한해였다.

서울에서 떠도는 노숙자들만 4천여명에 육박한다(서울시).

이들의 모습을 보고 문득 스코트 피츠제럴드가 1930년에 쓴 단편소설
"바빌론 재방문"을 떠올리게 된다.

1929년 대공황에 휘말려 1년을 보낸 파리의 스산한 풍경을 그린 소설이다.

공황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시끌벅적하던 풍경 대신에 여기저기서 소곤대는 소리만 들린다.

호텔가는 쥐죽은 듯하다.

바빌론 수도의 면모는 온데 간데 없었다.

그야말로 "탕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한국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처지가 됐다.

DJ정부는 이런 카오스(혼돈)상태에서 태어났다.

정부는 경제구조를 바꾸기 위해 규제개혁과 구조조정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들고 나왔다.

부실금융기관의 통폐합등 "빅뱅"을 재촉하고 있다.

하반기 들어서는 대그룹간 빅딜을 독려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내년 상반기중에는 실업자수가 2백만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노동부).

DJ정부가 손을 댄 일은 비단 이것 뿐이 아니다.

"총풍" "세풍" 진상규명, 외환위기 주범의 뒤처리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실종됐다.

국난극복을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기보다는 싸움으로 한해를 보냈다.

정치권에서 입만 열면 떠들던 정치개혁은 구두선에 그쳤다.

여권에서는 이런 문제가 한국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라며 비켜가려 한다.

그러면서 경제대국 일본의 예를 들곤 한다.

일본도 정치개혁이나 금융개혁이 늦어져 경제가 어려운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과 비교하는건 무리다.

그들은 최소한 경제가 정치를 끌어갈 수 있는 저력이 있다.

일본의 제조업경쟁력은 아직도 세계 제1의 수준이다.

무역흑자는 올해도 사상최대규모다.

외환보유고도 충분하다.

대외채권도 많다.

일본기업들은 5년간에 걸쳐 버블경기의 뒤처리를 거의 끝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구조조정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경제회생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도 기업인들의 사기 저하가 문제다.

그것은 정책의 모순에서 기인한다.

정부가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도 행정은 반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빅딜이 단적인 예다.

기업의 퇴출은 시장경쟁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게 상식이다.

그러나 이 중대한 과제에 대해 정부가 감놔라 대추놔라 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부규제에 대해 이렇게 빗댄 적이 있다.

"야구경기로 치면 심판과 코치가 한사람인 경우와 같다. 선수는 그를 코치
라고 생각하고 지도에 따랐는데 돌연 아웃을 선언한다. 이번엔 심판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일일이 작전을 지시한다"

이 말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그대로 부합된다.

기업들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는 얘기다.

또 한가지 문제는 정신적인 프로게리아 증상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프로게리아란 10대의 젊은이가 노쇠하여 머리가 빠지고 죽는 아주 희귀한
애늙은이 병이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실직하면서 우리사회에서는 이런 젊은 노인들이 양산
되고 있다.

그들은 좌절한 나머지 꿈을 잃고 살아간다.

이런 병을 없애지 못하는 한 우리의 내일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김대중 정부는 이런 난제부터 풀어야 한다.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일을 벌이다가는 한가지도 제대로 성취하기 어렵다.

DJ정부에 주어진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 kimhc@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