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피난시절이었던 52년 사법고시에 갓 합격한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김병로 대법원장을 찾아갔다.

김 대법원장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가족법의 일자일획도 못고친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법조계 초년생이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버릇없이 벌써 꼬리를
휘젓고 다니느냐"며 호통을 쳤다.

그의 가족법 개정운동은 시작부터 이처럼 험난했다.

그러나 억세고 끈질겼던 그는 악법개정의 뜻을 굽히지 않고 "민법중 친족
상속편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그때가 김 대법원장이 정년퇴임한 57년이다.

"여판사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법관이 되지 못하고 변호사가 된
이태영은 56년부터 여성법률상담소를 차려놓고 법률구조활동을 펴기 시작
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이어지는 이곳의 소장으로 95년 은퇴할때까지 그는
여성권익 옹호를 위해 "황소"처럼 일했다.

한때는 이화여대 법대학장을 지냈고 가정법원 설치에 핵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앞장선 일도 있다.

결국 그의 가족법개혁운동의 역사는 우리 여권신장의 역사이자 여성운동사인
동시에 인권사이기도 했다.

그가 여성 1백인의 힘을 모아 건립한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은 지금 한국여성
운동의 산실로 우뚝 서 있다.

"불평등한 법의 굴레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는 공로로 주어진
막사이사이상,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국제법률봉사상과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은 그의 여성권익옹호 노력에 대한 값진 찬가였다.

호주제폐지, 이혼때 재산분할청구권과 부모친권, 동성동본불혼제 등 그가
일생을 바쳐 노력했던 가족법개정안의 난제들도 이제는 거의다 마무리지어
졌다.

한국의 선구적 여성인권 수호자이자 해결사였던 첫 여성 변호사 이태영씨가
타계했다.

그가 막사이사이상을 탔을 때 50년 친구였던 서예가 이철경이 써 보냈다는
시 한구절이 생각난다.

"등잔 밑이 그늘져/그대 몸 숨겨져도/언젠가 그대 큰 뜻이/이땅 위에
빛되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