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일간지 D일보 경제부에서 근무했던 P 모 기자는 최근 회사를 그만둔뒤
재정경제부 홍보기획단 사무관으로 근무중이다.

채용조건은 2년짜리 계약직 공무원.

정년이 보장되지도, 연봉이 늘어나는 자리가 아닌데 과감한 전직결정을
내렸다.

동기는 의외로 간단하다.

기자생활이 더이상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

과거만해도 있을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는 불과 1년만에 우리사회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기업 및 금융부문의 구조조정 여파로 실업자는 쏟아졌다.

체감수입이 30% 이상 줄면서 중산층은 몰락했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업인조차 수입이 줄었다.

소득감소폭 이상으로 씀씀이가 격감, 내수산업이 신음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에게 과소비느 아련한 신화가 된지 오래다.

철밥통으로 일컬어졌던 공무원까지 타의에 의해 속속 공직을 물러나고 있다.

실적과 성과를 중시하는 연봉제가 기업체마다 경쟁의 강도는 날로 치열해
지고 있다.

[ 무너진 중산층 ]

현재 5인이상 사업장은 의무적으로 국민연금에 가입해야한다.

지난 9월 현재 사업자 가입자는 4백89만8천63명.

지난해말(5백60만9백47명)보다 무려 70만2천8백84명(12.5%)이 감소했다.

국민연금 가입자가 이같이 격감한 것은 지난 88년 국민연금 제도 도입이후
처음 있는 일.

물론 사업장의 휴.폐업 및 부도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실직가장이 그간 부양했던 식구를 감안하면 대략 3백만명가량이 중산층에서
하류층으로 떨어진 셈이다.

실직한뒤 1년이 넘도록 직장을 구하지 못해 납부했던 연금보험료를 찾아간
액수(반환일시금)는 지난 9월말 현재 1조4천53억원.

지난해 연간 실적(1조1천9백25억원)을 넘어선지 오래다.

내년엔 반환일시금을 찾겠다는 국민이 더욱 늘어난다.

IMF한파이후 실직자가 쏟아져서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올해 예상치(2조4천억원)보다 63% 늘어난 3조9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에 반해 이자로 살아가는 고소득층은 IMF시대가 영속화되기를 내심
희망하고 있다.

금리는 두배로 오른데다 금융종합과세가 철회돼 세금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든 호시절을 마다할 부자가 어디 있겠는가.

지난해말 연 30%안팎의 수익률에 30억원짜리 회사채를 샀다면 3개월마다
이자로 세후 1억7천만원이상을 챙길수 있다.

IMF체제이전인 지난해 11월만 해도 회사채수익률이 14.1%에 불과했던만큼
일부 금융자산가들끼리 호텔 일식집에서 양주를 마시며 "이대로!"를
연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통계청이 조사한 도시근로자 가계수지동향을 보면 "부익부-빈익빈" 추세가
한창 진행중임을 알수 있다.

3.4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2백7만2천원.

지난해 3.4분기(2백42만2천원)보다 14.4%(35만원)줄었다.

지난 95년 가격으로 환산한 실질소득은 1백76만1천원으로 전년동분기
(2백20만2천원)에 비해 무려 20% 감소했다.

무엇보다도 소득이 낮을수록 소득감소폭이 커진다는 게 심각한 문제.

소득이 가장 낮은 하위 20%인 1분위의 월평균 가구소득은 75만6천원으로
지난 1년전보다 24.4% 떨어졌다.

이에반해 상위 20%인 5분위의 가구소득은 4백13만원으로 이기간중 8% 감소
하는데 그쳤다.

2분위는 소득이 19.6% 줄어든데 반해 3분위와 4분위의 경우 각각 18.3%,
15.2%로 나타났다.

[ 사라진 신데렐라 꿈 ]

이같은 중산층의 몰락은 사회공동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심각한 현상이다.

대체로 서구사회의 사회지도층이 역사적인 정통성을 기반으로 기부 자선
등을 통해 사회통합에 기여하는데 반해 우리의 상류층은 그렇지 못하다.

국내에서는 화이트칼라 집단을 주축으로 한 중산층이 사회발전에 영향을
미쳐왔다.

그런데 최근 현대경제사회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대상가구의 20%정도가
자신은 더이상 중산층이 아니라고 응답했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현실에서 중산층마저 급격히 줄어들면 시장경제질서나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급진세력이 손쉽게 등장할수 있다.

이에 못지않게 걱정되는 점은 계층이동의 축소 가능성이다.

계층이동이란 상류 중류 하류로 분류되는 사회계층간의 이동을 말한다.

지난 60년이후 한국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 덕택에 계층의 벽을 넘는
신분의 상승이나 부의 이동이 빈번했다.

그러나 IMF체제는 저성장시대 개막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대에 재벌그룹을 창업하거나 지가폭등으로 일확천금을 노릴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수 밖에 없다.

이미 지난 1년간 우리 경제에서 5대 재벌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높아졌다.

6대이하 재벌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다.

글로벌 경제시대에서 국제적인 신인도를 갖고 있는 일류대기업이 무한경쟁
체제에서 유리할수 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결국 국가발전을 이끌어온 "나도 할수 있다"는 진취적 기상이 IMF한파를
맞아 위축될수 있다.

그만큼 우리사회의 역동성이 줄어들수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IMF 충격, 그이후"란 책에서 IMF시대를 맞아 신데렐라의
꿈이 깨지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와함께 신랄한 충고가 이어졌다.

"당신이 만일 하류시민이라면 향후 상류사회의 진입에는 최소 3대가 걸린다
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당신 스스로의 노력으로 중류정도에 들면 이를 기반으로 당신의 아들은
부를 축적할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손자는 교양 지성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 상류사회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출수 있을 것이다"

[ 거품이 빠진다 ]

재정경제부 C모 국장.

지난달 17일 모처럼만에 고교동창들과 만났다.

회동장소는 지하철역 주변의 강남구 A국시.

과천에서 지하철로 오후 7시30분쯤 도착, 보쌈과 칼국수를 먹었다.

소주 몇병까지 시켜마신뒤 추렴한 돈으로 계산하고 나서니 오후 10시.

지하철을 나눠타고 각각 귀가했다.

IMF시대이전만 해도 모였다하면 일식집이나 고기집이었다.

2차도 기본이었다.

유흥주점 등에서 폭탄주를 진탕 마신뒤 몰고온 승용차는 대리기사로
해결했다.

아직도 매일 야근하다시피할 정도로 일이 많은 재경부 경제정책국.

"지난해만 해도 탕수육 등 요리와 볶음밥 등 식사, 고량주를 곁들인 만찬을
즐길수 있었다.

그러나 부서운영비가 격감, 최근에는 자장면 짬뽕 등 식사만 시킬뿐이다.

그나마 머리수를 줄이려고 가능한 조기퇴근을 종용한다"(C서기관)

그나마 공무원은 올들어 본봉이 10% 삭감되는데 그쳤다.

민간기업 회사원들은 매출및 수입감소 여파로 수입이 최소 30%가량 깎였다.

D자동차 자금부문.

지난해만해도 한달이 1~2회쯤 됐던 부서 단위 회식이 최근에는 2개월에
한번이내로 줄었다.

메뉴도 소갈비에서 돼지갈비나 삼겹살로 하향조정됐다.

이 회사는 내년부터 영업 자금등 접대비가 꼭 필요한 분야에 한해 접대비
예산을 짤 계획이다.

나머지 부서는 아예 접대비를 구경할수도 없게 된다.

[ 실업고통 너무 크다 ]

이 정도의 아픔은 그나마 전방위퇴출시대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행복한
고민이다.

실업률은 지난해만 해도 2.6%에 불과했다.

실업자도 56만명에 그쳤다.

그러나 98년이 시작되자마자 실업공포가 현실화됐다.

실업률은 지난 1월 4.5%에서 7월에는 7.6%까지 치솟았다.

실업자도 1백65만명까지 늘었다.

반년만에 1백만명이상의 근로자가 직장을 잃었다.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공공근로사업과 직업훈련을 확대실시하는데도
실업률은 7%대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다.

전국의 노숙자는 지난해 1천명미만에서 4천명수준으로 급증했다.

전북 전주에서 경영하던 주유소가 부도난뒤 지난 4월 무작정 상경한 L모씨
(49).

이곳저곳 직장을 찾다가 갖고 있던 돈이 곧 동났다.

어쩔수없이 지난 여름부터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는 노숙자가 됐다.

집에만 있던 아내 박씨(47)는 파출부 식당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H그룹 기조실에서 인사업무를 맡다가 그만둔 C모씨(35).

초기 녹내장 증세를 보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데다 회사의 비전도 밝지
않아 과감히 사표를 썼다.

명문대 경제학과 출신인데다 인사분야의 전문가인 만큼 몇개월 쉬다가 다른
직장을 구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실직한지 한달도 못돼 오산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퇴직금은 생활비와 치료비로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은행원으로 있던 마누라도 연초 구조조정과정에서 명예퇴직당해 주위에
기댈 언덕도 없다.

게다가 내년초엔 둘째애가 태어난다.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 버려지는 사람들 ]

부산에 사는 김모씨(35)는 최근 실직했다.

퇴직금도 받지 못한채 직장을 잃은뒤 소줏잔이 입을 떠나지 않았다.

자연히 아내와의 싸움이 잦아졌다.

어느날 밤늦게 귀가해보니 아이들만 놀고 있었다.

아내가 가출한 것.

품이라도 팔려고 인력시장에 나갔지만 일자리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생활비마저 떨어지자 김씨는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기기로 했다.

자식을 버리는 비정한 부모가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 6월 현재 아동복지시설에서 보호중인 아동
은 모두 1만7천44명.

지난해말(1만6천9백36명)보다 1백8명(6.4%) 증가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난해까지 수용아동은 매년 7백~8백명가량 줄어들었다"며
"이같은 추세를 감안할 경우 IMF구제금융이후 6개월여만에 버려진 아동이
1천명쯤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신판 고려장도 성행하고 있다.

노인복지시설 입소 상담 건수는 하루에 10건이상에 달한다.

생활보호대상자만 보호할수 있는 무료노인복지시설은 대부분 정원이 찬
상태.

보증금 1천만~3천만원에 관리비로 30만~70만원을 내야하는 유료노인시설을
이용해야한다.

그렇지만 자식의 실직으로 생계가 곤란해진 노인들에게 "그림의 떡"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통계상 보호인원은 별 차이가 없다.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고려, 지난 5월부터 실직가정의 노인 1백10명에 한해
이달말까지 복지시설에서 일시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 최승욱 기자 swchoi@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