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직후]

급격한 정치 경제적 변동으로 중단됐던 대외무역이 46년 5월 재개됐다.

연간 수출은 고작 3백50만달러에 불과했다.

당시 환율이 달러당 5전.

요즘 웬만한 중소기업 수출실적에도 훨씬 못미치는 규모다.

수입은 미국원조 등에 힘입어 수출의 20배 가까운 6천70만달러를 기록했다.

대외무역은 5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기틀을 잡게 된다.

당시 정부는 미국이 원자재 지원규모를 줄여 경기가 침체되자 무역법을
제정했다.

상공부 주관으로 종합무역계획을 수립케 하고 무역관련 행정을 체계화했다.

미국이 원자재 원조규모를 줄이면서 생겨난 국내 경기침체를 수출로 극복해
보자는 계획이었다.

50년대말까지 초창기 수출은 오징어 활선어 철광석 중석 등 수산물과 광산물
이 대부분이었다.

산업 인프라나 기술력도 없는 상태에서 6.25동란까지 겪었으니 수출다운
수출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힘들었다.

59년에 이르러 수입은 2억9천1백70만달러로 크게 늘었다.

전체 비중의 73.1%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수입이었다.

당시 수입은 소비재 위주로 이뤄졌지만 전후 복구에는 여간 도움이 된게
아니었다.

특히 3백공업으로 불린 방직 제분 제당산업은 이때 토대가 마련됐다.

[ 60년대 ]

6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은 국제 수출무대에 본격 등장하게 된다.

3공화국 출범이후 강력하게 추진된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한국 수출에
날개를 달았다.

세계시장도 황금시대로 불릴만큼 상황이 좋았다.

안팎 여건이 이렇게 맞아떨어져 60년대 한국은 연평균 41%라는 경이적인
수출증가율을 지속했다.

섬유 합판 가발 신발 등 공산품 수출도 늘었다.

60년 20.9%였던 공산품 수출비중이 69년엔 81.4%로 치솟았다.

섬유는 총 수출의 41%를 차지하며 수출 대들보로 떠올랐다.

64년 11월30일엔 수출 1억달러를 달성했다.

"무역의 날"은 이때를 기리는 행사다.

60년대 정부는 로컬 신용장제도를 도입하고 무역업체를 청색 백색 홍색업체
로 나눠 세무조사를 면제해 주는 등의 혜택도 줬다.

[ 70년대 ]

2차례의 오일쇼크(73, 79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수출정책이 이어졌다.

그 결과 70년대 우리나라 수출은 전세계 연평균 증가율 20.5%보다 훨씬
높은 37.5%를 달성할 수 있었다.

77년에는 한국 무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구호로만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백억불 수출"을 현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개발도상국 또는 신생공업국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정부는 70년대에 중화학제품 수출에 온 힘을 쏟았다.

이에따라 70년 13%였던 중화학제품 비중은 79년 38%로 높아졌지만
경공업제품은 69.6%에서 51%로 낮아졌다.

품목도 다양해져 1천5백44개에서 5천9백94개로 불어났다.

교역을 하는 나라도 1백60개국으로 늘었다.

[ 80년대 ]

80년대는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결실을 본 때였다.

86년부터 89년까지 건국이래 처음으로 4년연속 무역흑자를 냈다.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화의 3저현상도 흑자에 톡톡이 기여했다.

수출구조는 중화학제품 중심으로 정착돼 전기전자 자동차 조선 기계류의
수출이 급속히 늘어났다.

전기전자 분야의 경우 79년 20억4천만달러에서 89년에는 1백71억3천8백만달
러로 8배 이상 늘었다.

수출비중도 12%에서 28%로 2배이상 확대됐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79년 4억2천6백만달러에서 89년에는 40억2천3백만달러로
9배 이상 신장됐고 같은기간 컴퓨터는 6백만달러에서 20억4천2백만달러로
6백80배의 신장률을 나타냈다.

자동차 수출도 1억2천8백만달러에서 89년엔 21억2천만달러로 급신장했다.

무역이 흑자를 보임에 따라 무역정책도 개방 및 통상마찰 해소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 90년대 ]

수출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지난 95년 세계에서 12번째로 수출 1천억달러를
달성하는 위업을 이루기도 했다.

또 반세기동안 수출규모를 4만배 가까이 늘리는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록도 세웠다.

수출구조가 자동차 선박 컴퓨터 철강 등 선진국형으로 바뀐 것은 물론이고
96년 기준으로 세계 12위 무역국이라는 자랑스런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90년대 들어 우리 수출은 위기를 맞았다.

무역흑자에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결과였다.

세계 시장에선 자국산업 보호를 위한 경제블록화가 진행됐고 세계무역기구
(WTO)를 통한 무역장벽 제거노력도 함께 진행됐다.

수출만이 살 길이었던 우리로선 더욱 어려운 여건에 처하게 됐고
무역수지는 적자로 뒤바뀌었다.

반도체를 앞세워 무역흑자를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96년엔 사상최대인 2백6억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90년대 무역의 또다른 특징은 "대선진국 무역적자 확대,대개도국 흑자확대"
였다.

자본재 수입이 늘어 대선진국 무역적자는 커지고 동남아지역 등의 경제성장
으로 대개도국 수출은 크게 늘었다.

대일무역수지 적자폭도 계속 확대됐다.

자본재 수입이 많았던 탓이다.

이에따라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95년까지 30년간 대일적자 누계는
1천억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 1998년 ]

수출은 지난 58년 이후 40년만에 감소세를 보였으면서도 사상 최대 무역
흑자를 기록한 것이 특징.

선진국으로의 수출은 증가한 반면 개도국 수출은 감소했다.

수출업체들이 원화 절하로 높아진 가격경쟁력을 이용해 선진국으로의 수출
에 적극 나섰기때문.

개도국 수출이 줄어든 것은 통화위기로 동남아 중남미 러시아 등의 수입수요
가 크게 줄어든데 원인이 있다.

품목별로는 철강과 선박 의류제품 무선통신기기 수출이 크게 늘어난데 비해
반도체 자동차는 감소세를 보였다.

철강은 올들어 10월까지 43억달러가 수출돼 30.8% 증가했으며 선박은
57억달러(23.4%)를 기록했다.

의류와 무선통신기기도 37억달러(14.2%), 21억달러(31.4%)로 늘었다.

반면 각각 수출 1, 2위 품목인 반도체와 자동차는 1백36억달러, 78억달러가
수출돼 작년보다 각 5.7%, 6.9% 줄었다.

올 수출의 또다른 특징으론 금모으기 운동에 힘입어 귀금속이 수출 3대 품목
에 낀 점이다.

귀금속 수출은 62억달러에 달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