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상임위의 예산안 심의과정을 지켜보면 아무리 시대가 달라지고 정권이
바뀌어도 부풀리기, 나눠먹기식 예산증액 관행은 개선될 기미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상임위의 예비심사를 거쳐 예산결산특위로 넘어온 새해
세출예산규모는 놀랍게도 정부가 요청한 85조7천9백억원보다 2조5천5백40억원
이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철저히 깎겠다"거나 "원안을 지키겠다"는 소속당의 당론에도 불구하고
여야의원을 가릴 것 없이 "깎일 때 깎이더라도 일단 올려놓고 보자"는
무책임한 행태로 일관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같은 행태는 26일 국회주최로
열린 새해 예산안 공청회에서도 지적됐듯이 국내총생산(GDP)의 5%에 이르는
적자재정의 위험성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마당에 불거진 것이어서 국회의
경제위기 극복의지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상임위 차원의 예산안은 앞으로 계수조정 작업을 거치면서 재조정될
것으로 보이지만 IMF고통을 이기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 나라 국회의원의 상식은 과연 어느 수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상임위에서 증액을 요구한 개별 사업비를 보면 고용창출이나 실업구제 등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역사업이나 민원사업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IMF 2차연도인 내년 예산안은 "개혁예산"이 될 것이라던
다짐을 무색케 한다. 특히 9천3백52억원을 증액한 건설교통위의 나눠먹기식
예산 끼워넣기는 너무도 상식 밖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건복지부 및
식품의약안전청 예산에서는 모두 59개 항목에 걸쳐 증액이 이뤄진 반면
감액은 6개 항목에 불과했다. 당초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에는 전혀 반영돼
있지 않던 "자유총연맹"예산이 12억원이나 책정된 경우도 있다.

반면 의원세비는 고작 0.3% 삭감하고, 시행을 보류키로 한 4급 보좌관을
증원하는데 드는 예산 1백12억원을 배정한 것을 보면 국회가 고통분담에
앞장서기 보다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시늉만 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세출예산은 기를 써 늘리면서 세입부문에서는 전문직 종사자에
대한 부가세 신설 문제 등 주요 사안들을 논의조차 없이 지나쳐 버렸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국회는 지금까지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해야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만 골라가면서 한 셈이다. 지금 우리는 과거와 같은 안이한
재정계획과 방만한 집행을 용인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국회의 예산심의권
이 그 어느때보다 효율적으로 쓰여지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놓여있다.

오늘부터 본격 시작될 예결위의 부처별 예산심의와 계수조정 작업에서까지
도 이같은 악습이 되풀이 된다면 국민들의 국회불신은 더욱 깊어질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얼마 남지않은 법정시한이지만 국회는 상임위 예비심사
에서 보인 추태를 씻고 제대로 예산심의를 해주기 바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