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 와서 사흘째를 맞았다.

전날 밤 동업자(문인)끼리 선상 주점에 모여 흥분을 달래다가 새벽에 붙인
눈을 새벽에 떴다.

그러나 일정이 해금강 관광이라 발걸음이 가볍다.

숨가쁘게 오르내릴 일이 없는 갯가이기 때문이다.

버스도 푹한 날씨에 파랗게 웃자란 보리밭은 좌우에 끼고 천천히 달리더니
반시간이 좀 넘었나 하여 일행을 부려 놓는다.

사방에 보이는 산이 죄다 50~60년대에 머문 민둥산이되 오직 해금강 일대
에만 나무가 남아서 경관을 더해주고 있다.

해금강은 바윗덩이에서 솔이 자라나 솔밭을 이룬 입석을 비롯하여 나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몇개의 돌섬으로 짜인 관광지였다.

북한에서는 해금강을 보지 않는다면 금강의 미를 다 모른다 하여 "바다이
금강"이라고 흰소리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도 동해안에 자주 가본 사람들에게는 여간해서 먹혀
들지가 않을 정도록 그렇고 그런 갯가일 뿐이었다.

북한에서 하는 말처럼 작은 배를 이리저리 저어가며 바다에서 건너다봐야
제대로 보이는 탓이었다.

뿐만 아니라 옛날의 해금강 고나광길을 복원한 다음이라야 동해안에 다녀본
남한 관광객들이 시들하게 여기지 않을 터이었다.

즉 신라때 네사람의 화랑이 놀다간 것이 네 신선이 놀고 간 이야기로
바뀌고, 옛날 어느 외국 장수들이 천하절경에 반하여 떠날 줄 모르다가
사흘동안이나 호수가에서 울고서야 발길을 돌렸다는 전설의 호수 영랑호와,
관동팔경의 첫째라는 통천의 총석정이 앞으로 관광길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해금강의 체면이 서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처럼 걷는 관광이 아니라 소형 유람선에 나누어 타고 이리저리
배를 부려가며 하는 관광이라야 할 것이다.

이 일은 북한이나 현대나 똑같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 같았다.

영광호나 총석정이나 군사시설이 문제겠지만 해안선은 곧 국경일진대
세상에 어느나라 해안선인들 군사시설이 없는 해안선이 있단 말인가.

군사시설은 으례 그런 것이려니 하고 관광하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해금강 근처에도 대밭이 있었다.

따라서 산천에도 팔자가 있다는 내 지론을 또 확인한다.

장전항의 장전은 글자 그대로 화살대를 뜻한다.

장전항은 본래 영진만이라고 불렸던 곳인데 그 언저리에 화살대가 많다하여
장전으로 바뀐 것이었다.

고려조에서 고을에 "단련사"니 "방어사"니 하는 무관 벼슬을 앉히고 조선조
역시 세조때부터 도호부로 승격시켜 진을 설치했던 것도 다 국방의 요충지
였던 까닭이었다.

지금의 화살대도 방위산업의 하나로 나라에서 가꾸었던 화살대의 후손인
셈이다.

겨우내 강추위가 엄습하고 사철 간기 있는 갯바람에 부대끼며 자란 대가
화살감으로는 십상으로 야무질테니까.

하여 거룻배 장전 1,2호가 차례로 탑승객을 나르는 곳도 전에 수군이 주둔
했던 오리진의 옛터였던 것이었다.

산천도 한번 군항이 되면 영원한 군항이 되는 모양이니 이제라고 왜 팔자
타령이 아니 나올 수 있겠는가.

무슨 팔자가 그런지 어렵사리 고향 땅에 찾아왔으면서도 남아있는 형제들이
아직껏 기다리고 있는 바로 눈 앞의 제 집을 못가보고 대명천지 벌건 대낮에
이만치 떨어진 갯바위 위에 제수를 진설하고 학생부군과 비유인에게 제사를
올리는 불효가 있었다.

장전읍 입석리 출신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정착한 이창식(67)옹과
두 살 터울의 아우 영식씨, 또 이씨와 내종간인 홍용찬(54) 익찬(52)씨
형제가 그들이다.

재수를 보니 밤 대추에 곶감은 삼색 실과려니와 초콜릿과 비스킷이 편과
적을 대신하니 50성상의 격세지감이 상에 오른 셈이었다.

때아닌 제사에 곡이 길고 구경하던 일행까지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기
전에 곡부터 따라하니 슬프다.

남의 설움이 내 설움이 되어 함께 우는 제사는 대체 어느 때에나
그치려는가.

상을 물리고 어울려 운 사람들과 음복을 마친 뒤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
처럼 고향타령이 늘어지는 가운데 일행의 발걸음은 삼일포로 향한다.

이제는 어찌타 이리 되었더냐는 장탄식도 그만들 하자.

갈길이 먼 나그네에게는 날도 일찍 저무는 터라 못다한 말은 이따가 긴긴
겨울밤으로 미룰 일이다.

삼일포는 해금강에서 돌아드는 시오릿길에 있다.

산도 높지 않고 물도 깊지가 않다.

문화유산 기행문학가 유홍준씨가 금강산 탑승의 더 없이 평온하고 맑고
훌륭한 후식이 삼일포라더니,와본즉 그 말이 참말이다.

머리에 파뿌리를 인 노인네까지 평온하고 맑은 얼굴로 웃고들 있는데,
소양강 처녀를 쓴 반야월씨가 낙동간 처녀를 쓴 월견초씨이듯, 삼일포로
옮겨와 웃는 이들이 아까 해금강에 모여서 울던 사람들이다.

남한에도 수많은 인공호수가 있으나 거의가 다목적이어서 규모는 바다
같아도 경관 하나는 말이 안되는 형편이지만, 삼일포는 바다나 다름없는
규모임에도 경관이 관동팔경의 하나라 수백년동안 시제로 팔리고도 이렇게
남았으니, 갸륵하고도 어여뿔사 어찌 찬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으랴.

산천도 한번 경관이 되고 나면 반드시 그에 얽히고 설킨 인간사가 따르기
마련이니 금강산과 봉래 양사언 공의 일화는 그 모범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경우라고 하겠다.

공은 봉래 외에도 완구.창해.해객 등 공이 금강산 소속임을 밝히는 호를
셋이나 가진 진정한 금강산인이었다.

공은 금강산이 속한 회양군수를 비롯하여 무려 여덟 고을을 돌면서 고을살이
를 살았거니와,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사 철원부사 안변군수 등 영전을
하거나 좌천을 가거나 금강산 그늘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공은 안평대군 한석봉 김구와 더불어 조선 전기의 4대 명필이다.

특히 초서와 큰 글씨의 종장으로서 금강산의 기세에 맞추어 쓴 필적이
내금강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 원화동천"이란 금석문으로 남아 있어서 늘
금강산의 내력과 나란히 읽힌 것은 공이 살아 생전부터도 당연한 일로 쳤던
일이다.

무릇 영명한 영혼은 자고로 유명을 달리한 뒤에도 천년토록 이승에 남아서
호흡이 여전한 법이거니와 공의 영혼이 과연 그러하였다.

공의 드높은 이름은 시로 살아 있고 글씨로 살아 있고 금강산으로 살아
있은즉 내가 여기서 한 말이 공연한 허풍만은 아님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메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공은 당면에도 세상에서 일컫던 금강산인이었다.

그렇다면 공이 읊은 태산은 어디인가.

어떤 이는 혹 중국의 태산을 끌어대지만 공이 하필 중국의 태산을 가져올
이유가 없고보니 공의 태산은 곧 금강산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로 50년동안이나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고 탄식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보라.

금강호 밤배를 타고 처음으로 건너온 금강산 탑승객 제1진이 한 패는
구릉연길로, 한 패는 만물상길로, 한 패는 해금강길로 나뉘어서 줄을 지어
장쾌히 오르고 있지 아니한가.

그 영명한 영혼은 진작부터 첫눈이 만년설처럼 내린 금강산 제일봉 비로봉
을 거닐면서, 마침내 사람들이 저마다 제아니 높다하고 오르고 또 오르는
모습을 어여삐 여기시어 하나같이 탈없이 내려가기를 진정코 굽어 살피실
터이다.

아아, 금강산은 모름지기 이렇게 와서 이렇게 오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던
것이다.

오르는 사람들이 먼저 금강산을 찬하고 이어서 아산 정공(정주영)을 반드시
찬하는 것도 애시당초 꾀만 높다고 빌미대지 않았던 그 높은 기상과 경륜에
옷깃을 여미는 바이니 봉래 양공이시여, 아산 정공에게도 부디 큰 상이
내려지이다.

이문구 < 소설가.경기대교수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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