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자도입촉진책 마련 ]


61년 9월 하순 한국경제인협회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과의 일련의
회합을 마치고 다음과 같은 "외자도입 촉진책"을 마련해 건의했다.

실은 건의했다기 보다 박정희를 설득시켰다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내용은 이랬다.

1)개별기업교섭으로는 외자도입이 어려우므로 미국 유럽 일본 등 세 지역에
외자유치단 파견을 허락할 것(당시 외국여행은 엄격한 허가사항이었다)
2)민간차관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줄 것
3)민간경제외교를 지원하기 위해 해외공관에 유능한 상무관을 주재시킬 것
4)민간 기업이 해외 기업가나 기술자를 자유롭게 초청, 공장건설 등을 협의
토록 해줄 것
5)외자에 의한 공장건설시 내자는 최대한 융자해주는 동시에 후취담보제도를
마련할 것
6)외자도입으로 기계 반입시 가동에 필요한 원자재 수입을 허용하고 그 판매
대전으로 소요 내자를 충당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
7)장기적으로는 자본시장육성이 절대 필요하므로 외국의 장기금융기관을
유치토록 할 것
8)외자도입촉진법 외환관리법 이중과세방지조약 등을 합리적으로 추진해
제정할 것.

이상과 같은 내용들은 당시의 우리 경제상황을 생각할 때 가히 혁명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외자도입 촉진책의 골격은 이병철 남궁련 박흥식 등 선각 기업인들이
해외 기업인들과 접촉하며 넓힌 견문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당시 금융계 학계 등의 전문가들도 광범하게 동원됐다.

경제인협회는 그야말로 총력태세로 경제발전계획을 짜냈던 것이다.

실무책임자였던 김주인씨(당시 한국경제인협회 사무국장)는 이렇게 회상한다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5.16 주체들은 집권 수개월 후에도 경제 재건의 앞이
보이지 않자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그래서 점차 경제인들의 말이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로 변해갔다"

경제인협회는 한편으론 부정축재처리법에 정한 기한내에 공장을 빨리 지어
부정축재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특히 기간내에 완성하지 못하면 재수감한다는 군사정부의 방침에 따라 당시
해당기업들은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기업인들은 이 과정에서 기간산업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경제에 일대 약진의 불을 짚이겠다는 열정을 키우게 됐다.

그래서 연일 모임을 갖고 내로라는 전문가들의 조언까지 얻어 외자도입에
관한 획기적인 건의안을 짜낸 것이다.

박정희 정부도 약속대로 그후 순차적으로 경제인들의 건의내용을 법제화했고
이는 곧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탄생시킨 기틀이 된 것이다.

필자가 당시 본대로라면 외자도입을 통해 공장을 건설키로 하면서도 세워
지는 공장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기업인은 당시 없었다.

우선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미 부정축재로 낙인찍힌 이들은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 전재산을 국가에
바칠 것을 내외에 공표했다.

사람이란 묘한 것이 절대절명의 처지에 이르면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는
모양이다.

특히 후손들에게 "부정축재자"란 오명만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고 솔직한
심정을 본인에게 털어놓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각종 지원을 얻어 공장을 지어 오늘까지 존속하고 있는 회사는 쌍용
양회 하나 뿐이다.

기업이란 정부 지원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박정희가 외자도입과 관련된 건의를 받아들이자 이병철 등 경제인협회
회장단은 외자도입 교섭에 있어서 국내적 준비는 일단 끝났다고 판단했다.

이에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외국정부나 기업인과 교섭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경제계 주도로 외자도입 제도를 만들어 군사정부를 전적으로 리드한데 대해
이병철 회장은 내심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는 실제 외자도입까지 성사시켜 경제에 관한한 경제계가 맡아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민간외자유치교섭단이 출발을 서두를 수 있게 됐다.

11월2일 출발하는 제1진은 미주지역교섭단으로 이병철 회장이 단장, 송대순
부회장이 부단장이었다.

남궁련 설경동 최태섭 구인회 정재호씨 등이 같이 떠나기로했다.

11월8일 떠날 구주지역교섭단은 이정림 단장에 조성철 부단장, 이한원
이양구 홍재선 김용성씨 등이 단원이었다.

이때에 경제계엔 약간의 풍파가 일어났다.

이미 언급한대로 한국경제인협회의 회원은 13명에 불과했다.

한국경제협의회 시절 70여명에 이르는 회원 중 경제인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경제인들은 군사정부의 정책변화를 살피며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인협회가 소수의 회원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눈에 띄는 활동을
벌이자 소외감을 가진 경제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경제가 경제인협회 13명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불만섞인 여론이
제기된 것이다.

61년 10월 25일 80여명의 기업인들이 국제호텔에서 회동했다.

이들은 송요찬 내각수반까지 참석한 이 모임에서 "한국경제협회" 창립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조직을 주도하는 이들은 젊은층에 속하는 심상준 정주영 이도영 사장
등이었다.

경제단체가 양분될 위기에 몰린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를 막기위해 회원제한 규정을 정관에서 삭제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경제인협회 측은 이한원 송대순 김용성 김주인씨 등 4인을 대표로 해 상대방
인 심상준 정주영 이도영씨 등과 10월 31일 반도호텔에서 만났다.

양측은 11월1일 서로 대동단결해 경제건설에 참여한다는 명분하에 경제협회
측이 경제인협회에 대거 입회키로 결의했다.

파동이 마무리되자 이병철 회장등 미주지역외자유치 교섭단은 이튿날인
11월2일 홀가분한 심정으로 미국을 향해 떠났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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