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독립".

외환위기에 데인 아시아 국가들에 던져진 화두다.

한바탕 환란을 겪는 동안 미국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만 제 2,
제 3의 환란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높아졌다.

그동안 외환보유통화로 달러화에만 매달리다 보니 달러가 조금만
빠져나가도 맥을 못추게 됐다는 자성론이 일고 있다.

환투기꾼들의 잔인한 공격을 받은데 대한 반격이기도 하다.

동남 아시아 국가들은 지금 "아시아 단일통화"도입을 추진중이다.

동남아국가 지도자들은 유럽연합(EU)의 유러화와 같은 통화통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

EU의 "유러"처럼 실생활에까지 쓰이는 완벽한 단일 통화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무역결제만이라도 가능한 "아시아 화폐"를 만들자는 것이다.

새로운 화폐를 만들기 어렵다면 일본 "엔"이나 중국 "위안"같은 유력통화를
아시아의 기축통화로 삼자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아시아 통화론의 선봉장은 말레이시아.모하마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작년말 "아시아가 역내통화를 사용해야 한다"고 일성을 터뜨렸다.

마하티르 총리는 "말레이시아의 경우 대미무역 비중이 18%에 불과한데도
전체 무역대금중 달러화 결제 비중이 70%에 이른다"면서 "아시아 지역에
금융위기가 재연되는 것을 막기위해선 아시아국들이 지나친 달러화 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상당히 구체적인 방안도 내놨다.

역내 무역에서는 당사국들이 자국통화로 무역대금을 결제하고 차액에
대해서는 공신력 있는 화폐를 선택해 중앙은행들간에 대금을 결제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달러 의존도를 30%이상 낮출 수 있고 외환거래에서 발생하는
금융비용까지 줄일 수 있어 달러부족으로 인한 외환위기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논리였다.

이후 동남아 지역에서 역내 통화로 무역대금을 결제하려는 움직임은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이미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이 두나라간의 무역거래를 자국통화로 결제하기로
합의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도 같은 조치를 심도있게 의논중이다.

최근들어서는 이같은 논의가 몇몇 이웃나라끼리의 협의단계를 지나 범아시아
적 차원에서 공론화되고 있다.

중국 일본 한국 및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외무장관들은 지난 7월말 마닐라
에서 열린 아세안 확대외무장관회담에서 동남아 지역에 단일통화를 도입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정식 의제를 논하는 자리가 아닌 비공식 만찬석상이었지만 아시아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문제를 다룬 것은 처음이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등 동남 아시아국을 중심으로 활발한 의견이
오갔다.

도밍고 시아존 필리핀 외무장관은 "일이 잘 풀리면 오는 2020년쯤 동남아에
도 단일통화가 들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세부적인 방안까지 제시되진 않았으나 역내통화중 하나를 단일통화로
삼거나 제3의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단일통화로 하는등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다소 엉성했지만 단일통화에 대한 도입시기가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처음이었다.

방향은 약간 다르지만 일본정부가 "엔화 국제화"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것도 아시아 단일통화와 궤를 같이하는 움직임이다.

엔화를 달러에 버금가는 세계 기축통화로 만들겠다는 게 일본정부의
구상이다.

아시아 각국도 지나친 달러의존에 불안감을 갖고 있는 만큼 엔화의 역할
증대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와함께 일본이 제안한 아시아통화기금(AMF)창설안도 아시아권의
경제홀로서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작년말 일본정부는 통화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들을 돕기 위해 독자적인
역내 통화기금 설립을 제기했지만 주도권 상실을 우려한 미국등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올들어 아시아 통화위기가 러시아 남미에까지 파급되고 세계경제전체
에 충격을 주면서 AMF구상이 다시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물론 아시아가 실제로 단일통화를 도입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문화와 생활수준이 비슷한 EU에서조차 단일통화를 도입하는데 3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하물며 이질적인 문화가 방대한 지역에 산재해 있고 경제력 차이도 큰
아시아에서 하나의 통화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아시아를 확실히 장악한 미국이 마냥 앉아서 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권의 통화통합 논의는 단순한 일과성 제스처로 끝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역내의 무역결제및 외환보유통화로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60%.

이대로라면 앞으로 언제든지 또다시 달러화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명실상부한 단일통화는 아니더라도 무역결제
및 외환보유통화로서의 제한적인 "준단일통화"의 도입은 가능하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 김혜수 기자 dearso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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