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소박한 생활인들에겐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장소다.

불세출의 명작이라는 작품앞에서도 도무지 감탄사가 나오지 않는 난감함.

예술적 감흥은 고사하고 작품의 의미조차 헤아리기 어려운게 많은 이들의
솔직한 심정일게다.

취미가 음악감상인 사람은 많아도 미술감상은 드물다는 사실 역시 일반인들
이 미술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미술은 생각보다 일상적인 삶에 바짝 다가서 있다는게 호암미술관의
선임큐레이터인 안소연(37)씨의 변이다.

"거실에 그림 한점 안걸린 집이 얼마나 있나요. 하다못해 화장실에 걸린
달력에라도 유명작가의 작품이 실려있게 마련인데요"

큐레이터는 이처럼 가깝고도 먼 미술과 대중의 만남을 주선해 간격을
좁히는 사람들이다.

안소연씨는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큐레이터 1세대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86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내 최초로 "큐레이터"를 채용하면서 전격
발탁됐다.

그 이전까지는 큐레이터라는 직종이 이땅에 없었던 때니 거의 맨땅에 헤딩
하기로 출발한 셈이다.

사실 안씨의 대학 전공은 미술과는 관련이 없었다.

이화여대 불문학과 81학번.

미술과의 인연은 대학교 2학년때 시작됐다.

순전한 호기심으로 생전처음 화실이란 곳에 나가게 됐다.

중.고등학교 동생들에게 "왕언니"로 불리며 데생을 배웠다.

그때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이 싹텄고 대학원도 미술사학과로 진학하게 됐다.

그러던중 85년 논문학기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장 드뷔페전의 도록
만드는 작업을 돕게 됐다.

행사중 탁월한 불어 영어실력과 미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여리여리한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게 며칠밤을 새워도 끄떡없는 "깡다구"를 선보인 끝에
주최측의 눈에 들게 됐다.

그렇게 큐레이터의 길에 들어선후 96년 12월 호암미술관으로 옮기며 정통
큐레이터 코스를 밟아오고 있다.

연륜이 연륜인 만큼 굵직한 전시회도 여럿 엮어냈다.

국립현대미술관 시절 20세기 프랑스미술전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등
주요한 전시를 도맡았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무엇보다도 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열렸던 한국미술 특별전이다.

작가선정에서 기획까지 혼신의 정열을 기울였던 "작품"이었다.

낡아빠진 고성을 빌려 "리스트럭처링"까지 모든 과정을 손수 돌봤다.

"호랑이의 꼬리"란 타이틀로 열린 이 전시회로 유럽에 한국미술붐을 일게
하는데 일조했다는게 미술계의 평가다.

그만큼 보람도 컸다.

이때 백남준 조덕현 김수자 등 참여했던 여러 작가들중 이 전시회를 계기로
국제적인 활동을 하게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는 것도 뿌듯한 점이다.

안씨의 또다른 직업철학은 작가와의 인간적인 관계 설정.

"작가를 선정하는 입장에서 자칫 호령하는 위치가 되기 쉬워요. 작가와
작품은 큐레이터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왠지 고상하고 세련돼 보인다는 이유로 큐레이터 지망생이 늘고 있는 것도
유감스럽다.

하루는 후배 한명이 큐레이터를 하겠다며 조언을 구하러 왔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업무와 보수 - 초봉이 보통 1천2백만원부터 시작
한다고 - 를 들려줬더니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더란다.

신진 큐레이터들이 1년이 못돼 나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잘못된
환상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다.

"폭넓은 미술지식도 중요하지만 예술에 대한 애정과 투철한 사명감이 필요
하다고 봅니다"

< 김혜수 기자 dearso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