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얀 티머 필립스 회장의 경영자상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최고 경영자의 진면목은 위기때 드러나게 마련이다.

티머 회장은 지난 90년 26억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필립스호를 폭풍에서 구해내 무사히 항진토록 한 주인공이다.

네덜란드의 자존심이자 세계적 기업인 필립스.

전세계 60여개국에 진출했으며 1백50여개국에서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이다.

1891년 백열전구를 생산하는 조명기구 업체로 출발해 면도기 TV 등을
선보이며 세계 전자시장의 선두주자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암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싼 제품가격과 깔끔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일본제품이 필립스가 장악했던
세계시장을 빼앗기 시작했다.

이윽고 90년에는 종업원 30만명에 이르던 필립스가 일본업체에 1위자리를
내줘야 했다.

얀 티머 회장은 87년부터 회사의 핵심부인 가전제품 부문 회장을 맡고
있었다.

최종 학력이 고졸인 그는 밑바닥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최고 경영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52년 19세에 필립스에 입사, 영업사원으로 활동하다 관리직을 맡게
된 것은 63년 에티오피아 지사장으로 발령받으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18년동안 그는 아프리카를 무대로 뛰었다.

이때 그는 저돌적인 영업능력과 과감한 추진력을 키우게 됐다고 말한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티머 회장은 순탄한 승진행진을 하며 81년 필립스
음반 사업부인 "폴리그램"사장을 맡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경영자 자질은 빛을 보게 된다.

적자에 허덕이던 폴리그램을 필립스 전 사업부에서 가장 이익이 많이 나는
사업부로 바꿔놓았다.

티머 회장 자신도 폴리그램을 세계적 음반 브랜드로 키운 그 시절이
자신의 절정기였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폴리그램에서 발휘한 역량을 인정받아 티머 회장은 87년 가전제품 부문
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당시 필립스는 소니 NEC 등 일본 가전제품에 밀려 필립스 본 고장인
유럽에서도 맥을 못추고 비틀거리고 있을 때였다.

티머 회장은 위기탈출의 비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했다.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허리케인 같은 위력의 개혁 청사진을 펼쳐 보이기로 다짐했다.

그는 먼저 단기 수익의 획기적 증대를 꾀했다.

인원감축으로 조직을 축소한 것도 이런 목적에서였다.

90~94년에 걸친 구조조정과정에서 6만명을 정리했다.

31만명의 임직원이 25만명으로 줄었다.

부동산도 처분했다.

방만하게 펼쳐왔던 사업에도 메스를 가했다.

흑자를 내고 있지만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업은 과감히 매각했다.

60여개에 달했던 사업을 일상용품, 전략적 부품, 전문시스템, 서비스의
4개 핵심분야로 통폐합하고 독일 프랑스 등에 있는 자회사를 미국 AT&T 등에
처분했다.

연간 4억길드(1길드는 약 0.52달러)를 경상비로 사용하는 재정 부문도
예외없는 구조조정의 허리케인을 피해갈 수 없었다.

3주에 한번씩 체크하던 사업단위의 재정상태를 매주 보고하도록 재정보고
시스템인 "아파치"를 도입했다.

연구개발부서도 정비했다.

그동안 필립스는 연구를 위해서라면 마음껏 연구비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필립스의 성장은 과감한 연구개발투자에 힘입은 측면도 없지 않았다.

필립스 임직원들이 처음에 일본제품을 깔본 것도 자신들의 기술우위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연구개발(R&D)투자가 비대해져 오히려 회사성장을 가로
막는데 있었다.

티머 회장은 이런 R&D아성을 무너뜨렸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연구개발을 중단토록 했다.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면 다른 나라의 기술도 받아들이도록 했다.

연구개발 및 제작부서를 통폐합해 제품개발기간과 비용을 줄였다.

그는 단기적인 구조개혁과 함께 내부 혁신을 주도했다.

티머 회장의 구조개혁 특징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먼저 기술지상주의를 깨뜨리는데 힘썼다.

이 회사는 기술지상주의에 빠져 상업화보다 기술 개발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마케팅에 대한 중요성도 느끼지 못한 상황이었다.

마케팅 능력이 일본업체에 뒤져 있어 기술을 먼저 개발하고도 제품판매에서
밀리는 현상이 빚어졌다.

티머 회장은 필립스인들의 의식개혁을 위해 필립스웨이(way)를 선포했다.

다섯가지 경영원칙도 발표됐다.

고객만족과 인적 자원중심의 경영을 골격으로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 92년 "고객의 날"을 지정했고 소비자 정보센터를
운영했다.

티머 회장은 또 마케팅을 강화했다.

입사 후 줄곧 영업을 하며 밑바닥을 섭렵했던 마케팅 전문가인 그는
소비자 중심의 마케팅을 도입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의식변화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타운
미팅"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는 모든 종업원이 참여하여 경영 전략부터 소비자 성향변화까지
논의된다.

또 대표적 포럼 경영방식으로 꼽을 수 있는 대규모 위성토론회도 열었다.

주로 마케팅에 대한 토론을 유도했다.

직원들 스스로 마케팅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아울러 임원들의 의식전환도 꾀했다.

고위 관리자로 구성된 임원교육 전략포럼을 만들고 이를 "백부장
회의"라고 불렀다.

이와 함께 신세계화 전략을 도입했다.

세계화를 넘어 현지화를 적극 추진한 것이다.

현지인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디자인과 스타일을 각 지역에 맞게 채택하도록
했다.

소형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유럽 싱가포르 등으로 분산시킨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탄탄한 기초기술에 지역특성에 맞는 디자인을 가미한 것이다.

티머 회장의 위기타개책에 힘입어 필립스의 1인당 종업원 매출액이 크게
증가했고 흑자기반도 마련됐다.

제품개발기간이 1년에서 6개월로 단축됐고 제품배송시간도 60%가량
짧아졌다.

3년만에 부채는 절반으로 줄었고 주가는 2배 가량 뛰었다.

벼랑에 선 필립스가 재도약하기 시작한 것이다.

< 강시현 AT커니 컨설턴트 seoul_opinion@ atkearney.com
이익원 기자 ikl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