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석 < 삼성경제연구소장 >

지금 생각하면 작년에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지만 마냥 두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실제 해야 할 수준에 크게 못미쳤기 때문에 IMF체제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다소 곡절이 있었지만 노동개혁법이 연초에 통과됐고 뒤이어 금융개혁도
추진됐다.

위기의식을 타고 뭔가 바뀌는가 했다.

그러나 위기감과 행동이 별개였다.

대선을 눈앞에 두고 여야가 열심히 싸워 무엇 하나 되는게 없었다.

이렇듯 작년의 IMF행은 위기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행동에 나서지
않아 당한 재난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작년 IMF가기 직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작년만 해도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몇몇 나라만 환란에 시달렸으나
지금은 전세계가 환란을 겪고 있다.

작년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이젠 급히 도움을 청할데도 없다.

워낙 급한 나라들이 많아 미국 일본 독일은 물론 IMF도 손을 쓰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벌써 러시아가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유예) 상태에 갔고 인도네시아도
비슷하다.

중국은 위안화 유지에 마지막 안간힘을 쏟고 있으나 금년을 낙관하기
어렵다.

아시아 경제의 엔진 역할을 해야 할 일본이 경제 회복은 커녕 작년보다 더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유일한 호황권이었던 미국 경제도 불안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IMF지원을 받는 나라들이 수출 증진으로 위기탈출을 해야 하는데 내다 팔
시장들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채무국들에 비교적 관대했던 독일 은행들마저 러시아에 크게 물려 대출
회수에 나서고 있다.

이대로 가면 세계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금융위기로 빠져들지 모른다.

이런 세계적 위기에 대해 힘을 합쳐 공동대처할 수 있는 주요국의 리더십
부재가 더 문제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 러시아 옐친 대통령, 독일의 콜 총리, 일본의 오부치
총리 모두가 정치적 상처를 입었거나 병환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입장이다.

국제경제 정세가 매우 긴박하고 혼란스러워 언제 무슨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벌써 그 여파가 한국에 몰려오고 있다.

한국 채권이 폭락세를 보여 외평채가산금리가 한때 10%를 넘었다.

가산금리가 IMF전엔 0.25%, 금년 봄에도 3.5%선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얼마나 사태가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과의 거래를 정상적으로 보지않는다는 뜻이다.

한국의 구조조정능력과 장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지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국 외채의 만기연장률(roll over)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의 신용이 좋지않은 것도 있지만 국제금융시장이 불안하고 특히
신흥시장(Emerging Market) 전체를 위험하게 보는 것이다.

일류 대기업에 대해서도 빠듯하게 연장해 주면서 일정분을 회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가용외환이 4백억달러를 넘기 때문에 당장의 외환사태는 걱정 안해도
된다.

바로 그것 때문에 여야간에 치열한 정쟁을 벌일만큼 여유가 있고 또 긴장도
풀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의 안정은 폭풍전의 정적같은 것이다.

금년 상반기엔 빚과 경상흑자로 버텼는데 빚은 갈수록 돌리기가 어려워지고
경상흑자는 급격히 줄고 있다.

상반기에 2백억달러가 넘는 경상흑자가 난 것도 수출호조보다는 수입급감이
주원인이다.

수출은 연초 반짝했다가 5월이래 4개월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수입감소도 정상적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하반기엔 경상흑자가 상반기의 절반수준인 1백억달러를 약간 넘을 전망이다.

수출의 바탕이 되는 산업기반이 무너지고 있는데다 해외사정이 썩 좋지는
않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시장 여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한 외환수급은 내년 봄이
또한번의 고비가 될 것이다.

외환수지 전반에 걸친 재점검과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지금도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해야 할 수준에 크게 모자란다.

작년 한국을 엄습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도높은 금융파고가 몰려오고
있는데도 그렇다.

작년에 뻔히 알면서도 결단과 행동이 없어 결국 파탄을 맞았듯이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위기불감증은 한국 경제에 있어 "알고 죽는 해소병"같은 것인가 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