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정말 내돈을 떼먹을 작정이오"

전화를 받던 킴스텍의 이상로사장(47)은 버럭 분통을 터뜨렸다.

선협전자가 외상값 결제를 계속 미루는 바람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도대체 이게 몇번째인가. 월말에 갚겠다던 3천60만원을 5개월째 미뤄오는
게 아닌가"

이 사장은 이젠 고발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함백산업(대표 김정래)의 경우는 이보다 더 심하다.

인천 용종동에서 플라스틱 사출부품을 만드는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13일까지 삼익전자에 전광판부품을 납품했다.

납품규모는 픽셀사출물 8만66천개 2천9백만원어치.

종업원 5명으로 연명해가는 함백산업에게 이돈은 무척이나 큰 돈.

그럼에도 삼익전자는 변명만 할 뿐 6개월이상 외상값을 갚지 않았다.

참다 못한 김정래사장은 지난 6월9일 공정거래위에 고발을 해버렸다.

반년만에야 외상값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 봉천동에서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원코퍼레이션(대표 이도용)도
비슷한 케이스.

자막표시기 3천4백만원어치를 납품했으나 한해가 넘어가도록 대금을 받지
못했다.

올들어 이처럼 외상값을 받지 못해 고통을 당하는 기업들이 갑자기
늘었다.

외상값 갚기를 꺼리는 풍토가 전염병처럼 번져나간다.

이대로 가다간 기업간의 신용 거래행위 자체가 붕괴될 위기다.

중소기협중앙회의 조사에 따르면 올들어 물품을 납품하고 현금을 받은
경우는 전체의 15.4%에 불과했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전인 지난 10월의 25.8%보다 10.4% 포인트나
줄어든 것이다.

외상거래액 증가보다 더 큰 문제점은 외상값 지불을 몇달씩 미루는 것.

현행 하도급 공정거래법상 외상값은 두달이내에 갚아야 한다.

그럼에도 두달이내에 외상값을 갚는 사람은 전체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85%가 위법행위를 저지른다.

그야말로 신용 무법천지인 셈.

외상값 지불을 미루던 회사가 망하면 외상값을 받지 못한 기업이 덩달아
부도를 내게 된다.

결국 "부도 도미노"로 이어진다.

이런 풍조가 왜 우리나라에서만 만연하는가.

자금난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업계의 나쁜 상습관 때문이다.

일본도 불황을 겪고 있지만 전체거래중 70%가 현금으로 거래된다.

외상값은 꼭 한달이내에 갚는다.

우리는 제도상으로도 문제가 크다.

하도급 거래공정법에 강제조치가 미흡해 이같이 법규정을 어긴다.

법률을 어기는 사람을 그대로 방치해두는 정부도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외상값 시비로 인한 분쟁도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서울 전농동에 있는 비오씨는 의정부에 있는 울엔터프라이즈로부터 받을
외상대금 9천1백만원을 놓고 8개월째 맞대결을 벌이고 있다.

이런 분쟁은 기업 경리장부에 미수금만 늘어나게 한다.

미수금이 매출의 30%를 넘어서면 위험하다.

외상은 결국 기업을 망치게 할 수 있다.

< 이치구 중소기업 전문기자 rh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