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태 <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ktlee@kiep.kiep.go.kr >

러시아 정부와 중앙은행은 17일 루블화 표시 외채에 대한 90일간의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금년말까지 루블의 변동폭을 대폭 확대함으로써 사실상 루블화의
가치가 33.6% 평가절하되는 것을 용인하는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같은 결정은 러시아 금융.외환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루블화의 평가절하 및 지급불능 등의 사태를 우려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러시아 외환시장에서 자본을 회수함에 따라, 러시아 정부가 루블화
평가절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이 러시아 정부가 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백억달러 이상의 막대한 외환을 보유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결국 15%~25% 정도의 루블화 평가절하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한 후, 러시아 외환시장 및 주식시장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 금융.외환시장이 악화된 보다 근본적 이유는 지난92년 시작된
러시아 경제개혁이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가 건전한 재정상태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한 재정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국제금융기구로부터의 지원이나 단기국채의
발행에 의존해 온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국제자본의 대신흥시장 투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고 아울러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인 원자재의 국제가격이
급락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더욱 취약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번 조치를 러시아 대외채무 전반에 대한 모라토리엄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된다.

러시아 정부가 루블화의 가치를 더 이상 현수준에서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아직까지 어느 정도(약 1백5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통제된 루블화의 평가절하"를 위해 단기자본의 유동을 막기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불가피하게 루블화표시 외채에 대한 한시적 지불유예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치로 러시아 정부의 대내외 신뢰도는 크게
손상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러시아 경제는 큰 어려움에 당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차입한 외환으로 고금리의 루블화표시 단기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수익을
취해온 러시아 은행의 구조상 루블화의 평가절하로 상당수의 러시아 은행의
파산이 우려되며 이는 기업들의 연쇄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생필품의 대외의존도가 큰 러시아에서 루블화의 가치하락은
물가상승으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금번 조치에 대한 대외적 파장은 무엇보다도 이번 모라토리엄이 러시아
대외채무에 대한 전반적인 모라토리엄으로 확대될 것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나,
현시점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된다.

이 경우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러시아를 거쳐 전세계 개도권 및
이행기경제권에 확산될 것이 우려되는데다 정치적으로 핵보유 군사대국인
러시아에서 반서방세력이 대두할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IMF의 재원이 바닥난 상태이고 IMF 재원증대에 미국 의회가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나 IMF 차원에서의 즉각적인 대규모 지원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갖는 위상과 사태악화가 가져올 파장을 감안할 때,
G7차원에서 조만간 러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대책이 마련될 것으로 전망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 경제에도 러시아 경제의 혼란은 또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수출의 1% 정도를 점유하고 있는 대러시아 수출이 급격히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이행기경제권 및 개도권 국가에 대한 수출에도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또 외국인투자자들의 투자심리 위축으로 외국인투자 유치에 다소 추가적인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우리가 구조조정을 강화하고 외환보유고를 늘림으로써
여타 개도권 국가들과의 차별화에 성공할 경우, 그 여파는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격동하는 세계경제 속에서 우리로서는 러시아
금융.외환위기를 예의 주시하면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혁을 보다
가속화시킴으로써 우리 경제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시키는 것이 최선의
대책일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