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화학자 수학자 경제학자 세사람이 표류했다.

먹을 것을 찾지못해 굶주리던 어느날 쇠고기 통조림박스를 발견했다.

정신없이 달려가 통조림을 집어들었으나 따개가 없었다.

어떻게하면 통조림을 열수 있을까를 궁리하던 이들은 각자 다른 해결책을
찾아냈다.

화학자는 통조림 밑에 불을 지피기로 했다.

수증기 압력으로 뚜껑을 터뜨릴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학자는 날카로운 돌을 이용해 통조림 캔을 갈기 시작했다.

경제학자의 생각은 달랐다.

따개를 이용하면 몇초내에 딸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사람을 비웃으며 따개를 찾으려 떠났다.

결과는 어땠을까.

화학자와 수학자는 1시간가량 고생끝에 쇠고기를 먹을수 있었다.

반면 경제학자는 굶어죽었다.

경제학자의 비극은 무인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채 있지도 않은
툴(수단)만을 앞세워 속도와 효율만을 고집한 결과다.

한 유명 컨설턴트는 요즘 한국의 구조조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비유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속도만 앞세웠지 구체적 수단과 실현가능성은 감안하지 않은
"막무가내식"이 많다는 얘기다.

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사실 그동안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은 "밀어붙이기식"이 적지 않았다.

그룹체제를 해체하라거나 내년말까지 부채비율을 자기자본의 2백%이내로
낮추라고 강요하는 정책등이 대표적 사례다.

그룹간 사업교환(빅딜)을 요구한 것도, 수년간의 관행을 부당내부거래로
"적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엔 아예 10대 업종을 골라 산업합리화까지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정부의 이런 정책은 물론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당장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라는게 국제자본의
요구였으니 말이다.

성과도 적지않아 국제사회의 신뢰를 단기간에 상당수준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입장으로선 받아들이기엔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

부채비율 축소 문제를 보자.

부채비율을 낮춰야한다는덴 기업도 이견이 없다.

문제는 시기다.

정부는 내년말까지 줄이라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평균 4백%가 넘는
부채비율을 2년안에 절반이하로 낮추는 것은 무리다.

5대그룹이 2백%로 부채비율을 줄이려면 무려 1백28조원을 갚아야한다.

천지개벽이 없는한 5대그룹이 이 빚을 갚기란 불가능하다.

그룹해체에 따른 문제점도 적지 않다.

대부분 그룹들은 정부정책에 따라 공식적으론 "그룹"이란 개념을 없앴다.

총수들도 명함에서 "<><>그룹회장"이란 직함을 뺐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론 여전히 옛 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아직 대안을 찾지 못한 탓이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정재계협의회등에는 꼭 5대그룹 회장을 부른다.

그룹을 없애라면서도 실제론 그룹회장 존재를 인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지시만 내릴것이 아니라 어떻게하면 주주 권익도 보호하면서
국내 오랜 관행에도 맞는 경영시스템을 고안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없애라고 명령하는 것만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정부의 역할은 구조조정에 필요한 원칙과 달성가능한 스케줄을 정하고
그 감독자가 되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굶어죽은 경제학자꼴이 되지 않도록 현실성있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설비가 남아도는지 모자라는지, 성장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해당사업에
목을 매고있는 기업이 더 잘안다.

무슨무슨 사업을 내놓아 서로 바꾸고 맞지도 않을 수급상황을 따져
과잉설비를 처리하는 정책은 부작용이 훨씬 크다.

"정부의 실패"가 불보듯 뻔하다.

이제 구조조정에도 "속도보다 질이 중요하다"(로버트 D 호메츠 미
골드만삭스부회장)는 견해도 귀담아 들을 때가 됐다.

정부정책은 구체적 실물경제 상황과 실현가능성에 근거해야 한다.

기업의 현실을 감안한다는 것이 절대 개혁의 후퇴는 아닐 것이다.

최필규 <산업1부장 phil@>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