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50년을 맞는다.

한국경제는 건국이후 50년간 영욕의 세월을 거쳤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농경국가에서 90년대 신흥공업국 선두 주자로
발돋음했다.

95년 1인당 소득 1만달러시대를 맛보았으며 선진국 클럽인 OECD(경제협력
개발기구)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강의 신화"는 모래성처럼 몰락했다.

지난해 선진경제 진입의 문턱에서 IMF 사태라는 총체적 좌절과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5일 "건국 50년 한국경제의 역정과 과제"라는 보고서에서
지난 50년간 한국경제의 흐름을 바꾼 10대 사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한국전쟁 =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우리경제는 산업기반 붕괴란
"도전"에 직면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3년간 412억원.

연간 국민총생산(53년 252억원)의 1.6배 규모에 달했다.

미국원조를 바탕으로 "응전"을 시작, 3년만에 전쟁전 경제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대미의존 심화와 군사문화 확산 등 부작용을 낳았다.

* 경제개발 5개년계획 =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정부주도의 자원배분
속에 대기업이 협력 파트너가 돼 진행됐다.

소위 "박정희 모델"이 가동된 것이다.

63년 경제부총리제를 신설, 종합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60년대 후반에는 수출지향으로 경제정책 기조를 일대전환,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부주도 방식이 고착화하면서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등 부작용이
싹텄다.

* 한일 국교정상화 =65년 한일국교정상화로 양국간 외교정상화와 외자유치의
돌파구가 마련됐다.

대규모 일본자금(무상 3억달러, 유상장기차관 2억달러, 상업차관
3억달러+알파)이 유입됐다.

외자도입을 통해 고도성장의 기폭제가 마련됐으나 대일의존이 심화되는
폐해를 낳았다.

* 오일쇼크 =73년과 79년에 2차례에 걸쳐 불어닥친 오일쇼크는 유가상승에
따른 적자확대라는 새로운 도전을 불러왔다.

외부충격에 허약한 한국경제의 체질이 노출된 것이다.

한국은 해외진출 중동특수 등으로 파고를 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에너지 다소비형 경제구조가 고착됐으며 부동산경기 과열을
부추겼다.

* 중화학투자 =73년 1월 박 대통령은 신년회견을 통해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했다.

자주국방과 산업구조 고도화를 목표로 중화학공업 육성에 드라이브를 건
것이다.

방위산업 등 기간산업이 집중 육성됐다.

현재 한국산업의 주력으로 부상한 조선 철강 자동차 전자 등이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시기다.

이는 산업구조편중과 재벌체제 및 과잉투자란 후유증을 낳았다.

* 10.26사태 =79년 10.26사태 이후 군사정권 계승과 이에 따른 안정화
정책으로 마이너스 성장후 회복이란 조정기를 경험했다.

고도성장 전략에 대한 반성이 나왔으며 안정화 기조로의 전환이 추진됐다.

개발연대의 종말을 알리는 대목이다.

신군부는 정치.경제 안정을 모토로 내세워 민주화 요구를 억압했다.

또 경제안정에만 중점을 두는 경직적 정책으로 투자가 위축됐다.

* 3저호황 =86년에서 88년에 걸쳐 한국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란
꿀맛을 맛봤다.

정부주도 수출지향 양적성장을 축으로 하는 정책의 성과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다.

유가 달러 금리 등의 3저현상 덕택이었다.

3년간 경상수지는 286억달러 흑자에 달했다.

3년연속 12%대의 높은 성장률 기록했다.

그러나 거품확산과 부동산투기 만연 등의 병폐를 확산시켰다.

* 6.29선언 =87년 6.29선언은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경제에는 악영향을 끼쳤다.

정치민주화 과정에서 억압됐던 욕구가 일시에 분출된데다 갈등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자유방임의 분위기 속에 경제보다 정치논리가 우선됐다.

노사갈등이 폭발, 사회전반에 비효율을 누적시키며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치뤘다.

* 문민개혁 =93년에서 97년에 걸친 문민개혁이란 단기성의 광범위한 개혁
조치가 실시됐다.

문민정부 중반이후 실익이 없는 전시성 선언과 국제기구가입 등이 이어졌다.

95년 소득 1만달러 달성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선진국 무드가
일면서 "과소비병"이 극에 달했다.

이 기간중 고도성장 모델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부실과 구조결함이 누적되며 대외신인도가 추락하는 등 암세포가 퍼지고
있었다.

미완으로 끝난 경제개혁의 마지막 기회였다.

* IMF사태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시작되면서 한국경제의 총체적 위기가
닥쳤다.

신청에서 합의까지 단 12일만에 IMF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자금이 한국에
수혈됐다.

중산충의 생활고가 심화되고 금융도산, 기업재편 등 고통스런 구조조정
과정이 진행중이다.

[ 한국경제의 흐름을 바꾼 10대 사건 -
한국경제 50년의 도전과 응전 ]

<>.한국전쟁(1950)

- 도전 : 전쟁피해, 산업기반 붕괴, 남북대치와 국방비 부담
- 응전 : 미국원조 도입, 체제경쟁
- 결과 : 53년 전쟁전 수준 회복, 대미의존 심화,
군사문화 사회 경직화, 미국식 관리체제, 교육의 확산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작(1962)

- 도전 : 빈곤사회, 민주화욕구와 사회혼란
- 응전 : 경제우선으로 민주화유보, 정부주도의 자원배분,
대기업을 파트너로 협력
- 결과 : 고도성장 기틀 마련, 경제가치우선(성장 등),
정부주도와 관치금융

<>.한일 국교정상화(1965)

- 도전 : 경제침체와 5개년계획 애로, 원조급감과 재원부족
- 응전 : 한일국교정상화 협정체결, 외자도입(청구권 포함)
- 결과 : 고도성장의 기폭제, 대일의존(설비/부품 수입),
한일간의 가깝고도 먼 관계

<>.오일쇼크(1973, 1979)

- 도전 : 중동전쟁과 유가상승, 경상적자 확대
- 응전 : 생에너지산업체제, 해외진출, 오일머니 획득(중동특수)
- 결과 : 에너지절약형 전환실패, 부동산경기 과열

<>.중화학투자(1977)

- 도전 : 경공업 한계, 주한미군 철수, 북한위협과 경제력 열세
- 응전 : 기간(방위)산업육성, 정책금융 등 기업지원
- 결과 : 산업구조고도화와 편중, 대기업다각화(재벌체제),
과잉투자 후유증

<>.10.26사태(1979)

- 도전 : 정변과 사회혼란, 중화학투자 과잉
- 응전 : 군사정권계승과 질서강조, 구조조정과 안정화정책
- 결과 : 마이너스 성장후 회복, 민주화와 시스템개혁 지연

<>.3저호황(1986~88)

- 도전 : 플라자합의와 3저 호기도래, 동남아 부상 등 여건변화
- 응전 : 투자촉진과 고성장, 수입자유화, 대외여건 둔감과 국정목표 상실
- 결과 : 고비용과 버블 확산, 흑자관리 실패, 부동산투기 만연

<>.6.29선언(1987)

- 도전 : 민주화요구
- 응전 : 자유방임, 경제보다 정치논리 우선
- 결과 : 노사갈등의 폭발, 고속철도 등 비효율 누적

<>.문민개혁(1993~97)

- 도전 : 초기 경기침체, 고도성장모델의 한계, 냉전종식과 WTO체제
- 응전 : 경기진작과 설비확장, 다발성 개혁조치, 집권말기 누수,
경제외교 미숙
- 결과 : 부실과 구조결함 누적, 파괴적 개혁, 갈등지속과 결단지연,
대외신인도 하락

<>.IMF사태(1997년말~)

- 도전 : 아시아 경제불안, 국제금융 영향력 증대, 내부 결함의 임계치
도달, 외환위기
- 응전 : IMF 지원금융과 처방수용, 정권교체와 개혁조치, 위기관리및
구조조정
- 결과 : 생활고, 중산층 침하, 기업재편과 교체, 글로벌스탠더드 확산,
현재의 선택이 미래결정

< 유병연 기자 yooby@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