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통상부 장관을 경질한것은 당연한 문책조치라고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문제가 된 러시아와의 갈등과정을 되새겨보면 우리 외교가 대외적으로
노련하지 못한 것은 물론 국민들에게 정직하지도 않다는게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러시아정부가 한국 정보담당 외교관의 한계를 넘는 행위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추방한데 대해 거의 즉각적으로 맞대응을 결정할 때 우리
외교당국자들은 과연 그 파장을 충분히 숙고했는지 의문이다. 러시아가
우리 외교관 5명을 추가 추방하겠다고 나서고 마닐라에서 열렸던 두 나라
외무장관회담에서 러시아측이 악수도 거절하는 등 고압적으로 나오자,
추방했던 러시아 외교관의 재입국을 허용키로 하면서도 이를 감추려고 나선
것은 한마디로 수준이하라고 질타받아 마땅하다.

이른바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추방한 외교관의 재입국을 허용한
나라가 일찍이 없었다는 지적이고 보면 나라망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차라리 맞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 만도 못한 꼴이고, 한국과의 외교에서는
강하게 나서면 물러선다는 좋지못한 선례마저 남기게 됐다고도 할 수있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외교통상부장관을 바꾼다고해서 문제의 본질이 해소된게 아니란
점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러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된데는
외교통상부와 안기부간 협력체제에 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란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대내적인 사안은 또 그렇다치더라도 대외적인 문제를 놓고도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식의 부처이기주의가 횡행한다면 큰 일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번 한.러사태는 해외공관에서의 업무지휘체계 전반에 대한 재검토의
계기가 돼야한다.

러시아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야할 필요가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러시아가 세계의 패권을 겨루던 초강대국의 위치를 상실한 것도 분명하고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있는 것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들의
자존심과 감정을 건드리는 사려깊지못한 일은 없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4자회담문제만 해도 그렇다. 러시아측이 불만을 표시하기전에
외교적인 접촉을 통해 우리 입장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충분했는지
의문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 엄청난 천연자원, 세계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등 러시아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남북
분단상황이 아니더라도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미국 일본과의 그것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한다. 바로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했다면 이번과 같은 갈등은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더이상 러시아와 불편한 감정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외교통상부장관
경질이 한.러관계 분위기를 쇄신하고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