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A사의 L이사.

석달전부터 그의 기상시간은 오전 5시30분이다.

그래도 영어학원에 들렀다가 출근하려면 빠듯하다.

늘그막에 남몰래 영어공부를 하느라 그의 고생은 말이 아니다.

영어고생은 지난 5월 회사가 다국적 기업의 손에 넘어가면서 시작됐다.

회의는 물론 보고서나 프리젠테이션, 팩스작성까지 회사내 주요업무는
모두 영어로 진행된다.

예전 직장에서는 영어 꽤나 하는 축이었다.

외국인과 의사소통하는데는 문제가 없을 정도다.

그런 그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경영회의를 1백% 이해하기는 힘들다.

전체적인 윤곽만 이해한 채 구체적인 문장의 뜻은 그대로 흘려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회의는 낫다.

영어로 해야하는 프리젠테이션은 정말 고역이다.

외국인 임원이 영어로 질문공세라도 퍼붓는 날이면 정말 등짝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자들 때문에 구조조정도 맘대로 할수없는 현실에
비하면 영어고생쯤은 아무것도아니다.

루머 한마디에도 기업이 죽고 사는 요즘, 구조조정 계획이 무산되는
날이면 기업은 생존자체에 위협을 받는다.

효성그룹 계열사의 K대표는 지난달 바로 이런 악몽을 겪었다.

그룹 2대주주인 미국의 한 투자펀드가 그룹의 계열사 합병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다니는 통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시세차익을 노리는 핫머니 투기꾼 탓에 이렇게 애를 먹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는 한탄이 나올만도 했다.

결국 효성그룹은 투자펀드의 지분을 모두 사들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여기에는 2백10억원이란 거액이 들었다.

그러나 지난 한달간 겪은 맘고생을 생각하면 K대표는 속이 다 시원하다.

한두달만에 해결되지 못할 일도 많다.

기업의 인수합병(M&A)으로 어느날 갑자기 파란눈의 최고경영자를 모셔야
하는 한국인 중역들의 문화적 갈등이 그렇다.

한국현실에 무지한 외국인 사와 아직도 한국병에서 깨어나지 못한
노사이에 끼어 속앓이를 하는 것도 한국인 중역들이다.

"외국기업에 인수됐으니 임금을 올려달라"는 노조측.

그러나 외국인 경영자는 "한국 근로자들의 평균임금이 내렸다는데 봉급을
올려달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양쪽 어느편에도 설 수 없는 한국인 중역은 고달프기만 하다.

외국인 투자자 모셔오기가 지상과제로 떠오르면서 중소기업 B사의 Y전무는
자책감에 휩싸였다.

회사성장의 일등공신이라 자부해온 그는 요즘처럼 무력감을 느낀적이
없었다.

앞으로 5년간 매출및 매출이익률등 사업전망 보고서를 제출하라는게
외국투자자들의 요구다.

자료를 구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몇날밤을 꼬박 새워 보고서를
만들었지만 외국투자자들은 영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다.

"논리적 근거는 희박한채 장밋빛 기대만 섞여 있다"는 비판뿐이다.

과거에는 돈 잘 꿔오고, 바이어 제대로 개척하면 그만이었다.

사업전망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해 본일도 없고, 할 필요도 없었다.

L전무로선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나 이런 임원들의 고뇌는 "경제위기"라는 상처가 아무는 과정에서
겪어야할 통증이라는게 기로에 선 경영진들의 고백이다.

그동안의 한국적 경영관행에서 벗어나 글로벌 스탠더드로 옮겨가기 위한
과도기적 혼란이란 얘기다.

독일 코메르츠은행과 공동 경영에 들어간 외환은행의 조성진 전무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적 관행은 많이 바뀌겠지요.

당장은 혼란스러울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가야할 방향 아닙니까"

< 노혜령 기자 hr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30일자 ).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