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금자학"이라는 말이 있다.

그 전거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으나 땔감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마침내
아름다운 음악의 상징인 거문고를 땔감으로, 고결의 상징인 학마저도
먹거리로 할 수박에 없었던 어떤 극한의 상황을 지적한 말이리다.

장차 우리 형편이 거기까지 갈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나친 우려일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거문고와 학을 문화와 정신의 상징으로 쓰고 있음이 분명한 이 말이 실로
심상치가 않다.

분명히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과 이상의 혼효속을 살아가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문화퇴출의 현상이 보인다.

그렇다, 퇴출, 어려운 시대일수록 신조어가 남발되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도 어제 오늘 가장 큰 고딕체로 정장을 하고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말이 이 "퇴출"이라는 말이다.

본래 이 말의 뜻은 스스로 견딜 수 없어 "물러서 나감"이다.

명사에 "하다"꼬리가 붙는 자동사이다.

자율적인 행위의 그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이 말처럼 타율적인 강압이미지를 지난 말이 없다.

최근 은행을 통합 정리하는 정부의 작업으로부터 비롯된 말이지만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삶 곳곳에 그야말로 슬픈 자율의 퇴출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관광부 자체의 보고에 의해서만도 주요공연장의 월평균 공연횟수가
지난해 간은 기간에 비해 46.4% 줄었고, 평균 객석 점유율도 70%에서 40%로
뚝 떨어졌다고 한다.

문예지들도 이미 휴간에 들어간 "한국문학", "외국문학"을 비롯해 휴폐간의
위기에 놓여 있고 면수축소, 고료지급 중단 현상을 보이고 있다.

퇴출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은행의 퇴출은 자기자본비율을 그 기준으로 한다고 하지만 문화의 자기자본
비율은 가시적 자본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정부 당국자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문화의 자기자본비율은 당대적인 것도 경제적 수익의 그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창조적 분모이다.

한번 망가지면 복구가 어렵다.

분별 있는 정책과 지원이 절실한 때이다.

정진규 < 한국시인협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