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러디즈니의 시련과 위기극복 (상) ]]

83년4월에 문을 연 일본의 동경 디즈니랜드는 월트디즈니사(Walt Disney
Company, WDC)최초의 본격적인 해외사업이다.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자 WDC는 자연스럽게 유럽을 다음 목표로 정한다.

80년대에 유로디즈니(Euro Disney)를 기획할 때만 해도 이 사업은 거의
보증수표처럼 보였다.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는 유럽인들은 여가활용에 돈을 많이 쓰고 있었고,
유럽에는 디즈니가 계획하고 있는 정도로 큰 테마공원이 아직 없었다.

게다기 디즈니라는 상표가 유럽의 구석구석까지 잘 알려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장미빛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92년4월12일 파리 근교에 위치한 유로디즈니가 개장한 후 첫 1년동안
이곳을 찾은 방문객의 수는 목표치인 1천1백만명을 능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년에는 이미 3억2천만달러의 손실이 발생했고,
방문객의 수는 93년에 비해 10%나 줄었으며 주가는 곤두박칠친다.

WDC는 채권은행단의 도움을 받는 것 외에 경영진을 유럽인으로 대거 교체
했다.

또 과감한 원가절감조치를 취하였으며, 가격제품 등의 마케팅측면에서도
변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95년에 처음으로 약 2천만달러의 이익을 내는 등 사정은 조금
나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영개선 성과를 보면 그동안 유로디즈니가 고전한 것은 유럽에서
대규모의 테마공원을 운영한다는 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 잘못이 있었던 것같다.

WDC의 가장 큰 실수는 유로디즈니를 직접 소유하고 경영할 뿐만 아니라
주변이 넓은 땅을 사들여서 그것을 대대적으로 개발하려고 한 것이었다.

애초에 디즈니가 그러한 계획을 세운 것은 일본에서의 뼈아픈 경험
때문이었다.

즉 도쿄 디즈니랜드가 엄청난 돈을 벌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본투자가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디즈니는 약간의 로열티만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영업이익을 직접
챙기겠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사업이 잘되면 주변의 부동산값이 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리 땅을 확보하고 호텔.상가 등을 세운 다음 그것을 나중에
비싼 값으로 팔아 넘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걸프전이 관광산업과 부동산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디즈니는 일단 개발계획을 축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방문객들은 미국에서보다 공원안에서 돈을 적게 썼다.

그들은 비싼 음식보다는 패스트푸드를 즐겼으먀,기념품도 많이 안 샀다.

게다가 2~3일 동안 묵으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에 호텔
방은 언제나 남아돌았다.

계절간의 차이도 예상보다 훨씬 컸다.

즉 하루의 내방객수가 성수기에는 9만명에 이르고 겨울에는 1만명밖에
안됐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93년에 유로디즈니사장으로 부임한
프랑스인 필립 부르기뇽(Philippe Bourguignon)의 과제였다.

부르기뇽은 우선 채권은행단및 본사와의 지루한 협상 끝에 이자및 로열티의
지불을 당분간 유예시키는데 성공한다.

유필화 <성균관대 교수.경영학.phyoo362@hitel.net>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