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섭 < 서울대 교수.사회학 >

경제의 붕괴가 가족의 붕괴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파산.실직한 가장의 가출이 전국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뒤에 남은 가족들의 절박한 사연이 눈물겹다.

파산이나 실직의 어려움을 온 가족이 함께 견디어 보다가도 그 정신적.
물질적 충격에 짓눌려 부인이나 자녀가 가출해 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자살이라는 더욱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많다.

심지어는 죽음의 목전에서도 자식 걱정을 떨치지 못해 멋모르는 아이들까지
저승길에 동반시키는 처절한 행태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인들은 개인으로서 존재해 온 것이 아니고 가족으로서 존재해 왔다.

사투에 가까운 직장생활 가계운영 입시공부에 매달려 온 대다수의 성인
청소년들은 가족의 안녕과 영광이라는 절대과제의 달성을 위해 산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정신적 격려와 물질적지원 역시 가족 속에서 충족되었다.

최근의 경제위기에 따른 고통이 가족적 차원에서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가족이 동시에 위기 극복의 주체여야 한다는 현실의 요구에
있다.

실직.파산당한 가장이나 그의 배우자 자녀가 기댈 곳은 그들 자신밖에 없다.

형편이 나은 부모형제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실직.파산자들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도 못한 사람들은 초인적 의지로 가족이 힘을 합해 내핍과 재기에
임할 수밖에 없다.

식민착취와 전쟁의 고난도 그렇게 이겨낸 한국인들이기에 이번에도 어떻게든
견디어 낼 것인가.

차라리 죽음을 택했거나 하루에도 몇번씩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같은 "민족적 저력"이 얼마나 의미있게 느껴질까.

그런데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왜 경제위기의 모든 고통이 가족 차원의 문제로 귀착되고 납세.병역 등의
의무를 짐지웠던 국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가.

한때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걷힌 세금을 무모한 초대형 토목사업 등에
탕진하고 막상 납세시민의 어려운 시기를 대비한 사회보장장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것이 이 나라의 정부다.

각종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가족규범의 추락을 들먹이며 관료 정치인들이
시민들에 대한 도덕적 훈계에 유행처럼 나서기도 했다.

대토목사업의 설계 잘못과 부실공사로 몇십년치 공공구호 예산이 간단히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당장의 생계위기에 국가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한국인들의 처지다.

이같은 국가 책임의 유기가 기업들에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생계 주택 의료 교육 무엇하나 국가로부터 충분히 지원받지 못하는 노동자
들을 고용하는 한국 기업들은 그만큼 노동자들의 가족부양의 짐을 함께 져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실직에 대한 국가적 완충장치 부재의
결과를 노동자들과의 극한 대립으로 겪고 있다.

국가도 기업도 삶의 의지가 되지 못하는 요사이 한국인들에게는 파산.실직의
고통을 가장 직접적으로 함께 겪어야 하는 가족에게 생존과 재기를 기대야
하는 역설이 있다.

비록 대다수 시민들의 가족은 그러한 역할을 어렵게나마 수행해가겠지만
파멸의 언저리에 있는 가족들의 수가 워낙 급증하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대량 해고에 이르기도 전에 말이다.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빈곤층은 빈곤층대로 갈수록 암울해지는 현실 속에서
가족을 떠나거나 버리거나 증오하거나 심지어 함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들이 이제는 특별한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민족에 비교해도 강인한 우리의 가족들이 인내의 임계점을 넘어
집단적으로 파멸하는 사태가 온다면 경제재건뿐 아니라 사회질서의 유지도
어려워질 것이다.

모순된 것인 줄 알면서도 시민들의 꿋꿋한 의지와 용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이제부터라도 국정책임을 맡은 관료 정치인들이 각종 사회보장장치를
비롯한 사회정책의 확충에 만전을 기해 나가야한다.

당장의 실업대책에 있어서도 부양가족의 생계 주택 의료 교육 등을 종합적
이고 유기적으로 마련하는 지혜를 모아야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