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말께 미국주재원으로 나간 친구에게서 "한국사람은 셋집 얻기도
어려운 시절이 됐다"는 푸념섞인 전화가 왔다.

복덕방에 내놓은 집을 몇곳 둘러보고 이튿날 계약을 하자고 전화를 했더니,
한 곳은 오늘 오전에 나갔다는 얘기고 또다른 한 곳은 주인이 세를 놓지않고
팔기로 했다며 미안하게 됐다고 하더라는 것.

복덕방들이 한 얘기가 모두 사실인지, 아니면 이 친구의 말대로
한국사람은 집세를 제때 못낼까봐 꺼린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고약한
기분은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나라경제가 말이 아니고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제풀에 기가 죽게 마련이고
자격지심도 없을 수 없다.

어쩌다 우리가 이꼴이 됐는지, 좋은 시절이 다시 오기는 올지, 상념은
끝이 없다.

나는 환란의 원인을 외국자본의 음모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시각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WTO(세계무역기구)이후의 유행어인 "무국경화"란 말의
의미를 이래저래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도 한다.

투기성 단기자금에 국경이 열린 시대, 음모가 있건 없건 약한 나라경제가
사냥감이 될 수 있는 현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쿄외환시장에서 엔이 마침내 달러당 1백40엔을 넘어섰고 그 영향이
겹쳐 아시아 각국의 통화와 주가가 동반폭락했다는 보도는 더욱 한국경제,
그리고 전체 아시아경제의 앞날을 걱정스럽게 만든다.

"달러당 1백50엔까지는 용인하겠다" "이번 G7(선진7개국) 재무차관회담은
전적으로 러시아문제를 다룰 것"이라는 루빈 미국 재무장관의 잇단 발언과
"엔화 약세가 지나치다"며 시장개입을 시사한 마쓰나가 일본대장상의 발언은
표현상 명백히 거리가 있지만, 최근의 정황을 종합하면 달러강세-엔약세는
미.일의 합작품인 인상이 짙다.

엄청난 무역흑자를 내고있는 나라의 통화는 계속 약세고 적자국 통화는
강세인 오늘의 상황을 교과서적인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경제기반(Fundamental)과 무역흑자구조에 거의 변함이 없는 상황에서
달러당 70엔대의 환율이 1백40엔대로 바뀌는게 시장의 논리, 곧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것이라면 그 손은 누구의 손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만약 일본정부가 엔절하를 통한 수출증대로 일본경기를 되살리려는
의도라면, 나는 그것은 큰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수출로 돈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그 돈이 일본서 돌 까닭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할인율이 0.5%인 초저금리에 약세통화라면 엔화형태로 일본에서 자산을
운용하는 것은 돈의 논리에 어긋난다.

미국의 달러표시 금융자산으로 운용할 경우에 비해 수익률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듯 엔화표시 금융자산이 달러로, 그리고
미국으로 몰리는 것은 순리다.

돈이 몰리니 세금도 더 걷히게 마련이다.

미국 재정흑자에는 엔약세와 아시아통화불안이 큰 보탬이 됐을 것이라고
봐도 큰 잘못이 아니다.

엔저로는 무역흑자는 낼 수 있겠지만 돈의 미국행을 막을 수는 없다.

투자가 미국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는 여건에서 경기가 뜰리 없고 보면
또다른 엔약세를 부르는 악순환만 되풀이하게 될것이다.

이미 3천억달러에 육박할 것이라는 일본의 미 재무부 증권보유액이
더 늘어난다고해서 일본경기가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일본과 아시아각국의 경제정책은 통화안정에 최우선적인 목표를 둬야한다.

미국에서도 비판론이 일고있는 투기성 단기자금의 부정적 측면을 직시하고
그 이동을 규제할 국제적인 규범을 마련하는데 힘을 합치는 것이 긴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이 그 엄청난 대외자산을 풀어 일본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과감하게 투자해야겠지만, 우리 정부나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일본의 아시아경제에 대한 역할증대, 이른바 엔블록의 태동움직임에 대한
관념적인 거부반응이 더이상 바람직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 통화통합도 따지고 보면 결국 그런 인식의 발로겠지만, 달러전횡의
국제금융구조에 대한 아시아의 대책이 필요하다는걸 인식해야 할 때가 됐다.

아시아통화기금(AMF), 엔의 국제화 등 일본쪽에서 나오고 있는 주장에
우리도 좀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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