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웠던 영국유학 생활 ]]

57년이 돼 미네소타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인 친구들과 유학생들은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귀국해봐야 오라는 데도 없을 것이고 밀어줄 사람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자유당 말기라 정권연장을 위한 온갖 부정 부패가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남으려 해도 학비를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그해 여름방학 때엔 미국 내수경기가 좋아서인지 아르바이트 거리가 제법
많았다.

재고 상품을 정리하는 일을 해봤다.

물건 수를 정확히 세고 앞뒤를 맞춰야 하는 쉽지않은 작업이었다.

그동안 해왔던 단순노동에 비해 3배가 넘는 돈을 받았다.

1천달러 이상을 벌었다.

큰 돈이 생기자 갑자기 공부를 더 하고픈 욕심이 생겼다.

그동안 한국행 비행기값은 자기가 대주겠다고 약속해온 미국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다.

"네가 준다는 돈을 합하면 2천달러는 된다. 영국에서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영국에 가고 싶다"는 요지였다.

내가 학업을 계속 하기를 바랐던 그 친구가 오히려 기뻐했다.

배움의 길을 계속할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한 것이다.

문제는 여비였다.

그때부터 가장 저렴하게 영국에 가는 방법을 조사했다.

12월 하순 비수기에 뉴욕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가는 배편이 제일
싸다는 것을 알아냈다.

2백75달러를 내면 "퀸메리호" 4등석을 탈 수 있었다.

1주일 항해동안 식사도 제공된다.

생애 처음으로 "초호화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57년 12월 20일 밤 정든 미네소타를 떠나 이튿날 오후 뉴욕에서
퀸메리호에 올랐다.

7만5천t급인 퀸메리호는 자매선인 퀸엘리자베스호(8만3천t)와 함께 대서양을
횡단하는 호화여객선이었다.

5대양 6대주를 주름잡던 대영제국 시대의 산물이었다.

비록 맨 밑바닥 선실에서 잠을 잤지만 1주일간 별 눈치보지 않고 구석구석을
답사했다.

최상층에 있는 초호화객실도 기웃거렸다.

거기엔 1등객실 전용 영화관도 있었다.

아마 헤밍웨이 원작의 "해는 또 다시 뜬다"를 상영했던 것 같다.

1주일만에 영국에 닿았다.

시내에서 줄을 안서고 택시를 타다 경찰관에게 무안당했던 런던의 첫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내가 입학한 학교는 런던정경대학원(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이었다.

약자인 LSE로 더 알려진 학교다.

지하철로 1시간30분 걸리는 런던교외에 싸구려 하숙방을 얻었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미국에 비해 불편하고 궁색했다.

하숙방 세면기엔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동전을 넣어야 온수를 쓸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넘쳐나던 미국의 풍요와 비교돼 많이 놀랐다.

당시 런던시내에는 2차 대전 당시에 폭격당한 흉측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거만한 것으로 알려진 런던시민들의 얼굴에도 기진맥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학교 등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영박물관 옆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계란 두 개를 샀다.

계란 옆에 예쁘게 생긴 초콜릿이 있어 그것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주인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재수가 좋네요. 바로 어제까지 이 초콜릿은 배급이었거든요. 돈이
많아도 마음대로 살 수 없었지요"

2차대전의 상처는 종전 13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국에서 공부하는데도 문제는 역시 학비조달이었다.

장학금 교섭이 잘 안돼 항상 쪼들렸다.

다행히 1년 정도는 어려움이 적었다.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자유당 정부의 비현실적인 환율제 덕을 톡톡히
봤다.

방식은 이랬다.

미국에서 방학 때 번 돈을 귀국하는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서울 암달러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 돈으로 유학비 송금을 위해 공정환율로 환전하면 3배가 됐다.

1백달러를 고국에 보내면 3백달러가 돼서 돌아왔다.

암달러 환율과 학비송금 환율의 차액으로 나는 궁한 학비일부를 해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듬해인 58년에 가서는 불가능하게 됐다.

이승만정부가 미국 원조당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소위 "환율현실화"를
추진해 공정환율과 암시세 환율차가 점점 좁아졌다.

학비조달길이 막힌 것이다.

영국에서는 미국과는 달리 아르바이트 자리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영국 생활은 그래서 미국에서 보다 훨씬 힘들었다.

50년대만 해도 영국은 경제학 정치학 등에서 세계의 중심이었다.

아침에 세수할 온수를 얻기가 불편할 정도였지만 문화와 학문적 축적은
대단했다.

나이든 교수들도 한학기 강의를 마치고 나면 몇달 후 그 내용을 책으로
출간했다.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돼 대학의 연구성과가 일반에도 전달됐다.

그만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그 기반도 확고한 것이었다.

내 지도교수는 행정학과 도시계획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이었던 로빈슨
교수였다.

그는 40~50년대 대런던계획과 위성도시 개념을 도입해 런던을 세계적인
도시로 꾸민 주인공이었다.

나는 로빈슨 교수에게서 재정학과 경제발전론을 주로 배웠다.

내가 59년 귀국 직후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 들어가 "3개년 계획"의
재정과 조세부문을 맡게 된 것은 이 때의 공부가 바탕이 됐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8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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