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보수당의 대처수상이 집권한 직후였다.

주프랑스와 독일대사를 역임하고 은퇴를 앞둔 중진 외교관 핸더슨경은
공직생활을 정리하는 고별보고서(Valedictory Report)를 은밀히 작성했다.

2차대전이후 영국 독일 프랑스의 경제정책을 분석한 것.

특히 노사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핸더슨경은 "영국의 정치 경제 국제적 지위가 급격히 약화된 원인은 노조의
병폐에 있다"고 결론내렸다.

이 보고서는 소속정당인 노동당의 정책을 강도높게 비판한 것인만큼 당연히
"비공개"였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이를 입수, 대서특필했다.

영국 정가가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며칠뒤 대처수상은 물의의 주인공인 핸더슨경을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영국의 근본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예고한 "사건"이었다.

꼭 20년뒤인 98년.

영국은 노동당 지배하에 있다.

그렇다고 다시 노조가 힘을 얻은 것은 아니다.

노동당인 토니 블레어 현수상은 "대처의 아들"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처의 정책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한 것을 놓고 경제계가 "노조의 반발"이
아닌 "개혁추진에 노조도 힘을 실어준 것"으로 평하고 있을 정도다.

파업천국이었던 영국은 이제 "노사분규 제로시대"를 맞고 있다.

대처집권 당시인 79년 3천만명이었던 노조원이 7백만명(95년 현재)으로
줄어들었다.

노사분규건수는 연 2만9천4백74건에서 4백15건으로 당시의 1.4%수준으로
감소했다.

분규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외국인투자기업의 경우는 더군다나 노사분규를 생각할 수 없다.

"웨일스지방에 수백개의 외국인기업이 투자하고 있지만 노사분규는 지난
73년 진출한 소니사에서 단 하루 파업했던 것이 전부"(나이질 휘첼로 웨일스
개발청부청장)일 정도다.

"노동자들의 철학이 바뀌었지요. 시위나 파업은 실업만 양산할 뿐이고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되니 자연스레
노조가 회사에 협조하게 된거지요"

데이비드 보울즈 영국북부산업개발공사(NDC) 전무의 말이다.

영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중 "노사분규" 발생건수는 아직 한건도 보고되지
않을 정도(김칠두 주영한국대사관 상무관)다.

영국의 노조활동이 이처럼 위축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나름의 역사가 있다.

18세기후반 산업혁명이후 자발적으로 구성된 영국 노조는 20세기초 출범한
노동당과 관계를 강화하면서 발전해왔다.

45년 첫 출범한 노동당정권의 모태가 되었고 60,70년대에는 정부를 움직이는
실세역할을 했다.

하지만 70년 후반들어 노조중심의 국가경영이 완전고용과 복지확대에
실패하면서 일반국민과 지도층들이 노조의 존재이유에 대해 회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를 폭발시킨 것이 이른바 79년 "불만의 겨울".

당시 주요 기간산업이 생산을 중단한 것은 물론 무덤파는 사람들의
파업으로 묘지에 묻히지 못한 시체가 쌓이고 쓰레기를 치우는 시청 청소부의
파업으로 군대가 출동해 쓰레기를 치우는 웃지 못할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대처의 노동개혁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80년대 전반에 걸친 개혁의 핵심은 노조의 승인권.

대처는 노동자의 노조가입권은 그대로 존속시켰지만 사용자가 노조를
승인할 권리를 갖도록 했다.

이는 무노조나 전체 근로자를 대표하는 단일노조와의 협상을 갈망하던
기업인들에게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복수노조 간부들의 단체협상권이 부인되자 각 노조단체들은 회사의 공인
단일 협상파트너가 되기위해 경쟁적으로 경영진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당시 언론은 이를 "미인선발대회"라고 까지 평했다.

특히 단일노조는 뉴캐슬에 진출한 닛산자동차에서 처음 시도됐는데 지금은
가장 대중적인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에서 이슈가 되는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제 등도 영국에선 정착된지
오래다.

"사업의 중단과 필요성의 감소"를 사유로 규정하고 있는 정리해고제는 최근
사용자에게 유리한 판례가 계속 나오고 있다.

노사간의 계약을 통해 근로시간을 연장하는 변형근로제도 잘 운용된다.

통상 변형된 시간은 오버타임에 해당되지 않으며 주48시간 근로제를
도입했을 경우 48시간 이상만 오버타임에 해당된다.

변형근로제도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대한 근로자의 만족도도 80%에
이른다.

한국기업가들이 영국의 투자여건에 대해 물어볼때 가장 관심을 보이는
분야는 노사관계.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준비가 별로 되어있지 않다.

노사문제는 그야말로 아무런 "문제"가 아닌 탓이다.

< 카디프=육동인 기자 dongi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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