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유년시절 (상) ]]

나는 62년 10월 한국경제인협회 사무국장으로 취임하면서 재계와 인연을
맺었다.

그후 지금까지 35년 넘게 민간경제계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

재계에 발을 들여놓기까지 내가 뭘 했는지 밝히는게 순서인 것 같다.

나는 1922년 가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났다.

종성은 세종대왕 때 두만강변을 따라 김종서 장군이 세운 육진 가운데
하나다.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난지 얼마안돼 20여리 떨어진 동관으로 이사했다.

내 어린시절은 두만강과 떼놓을 수 없다.

나는 두만강이 온누리에서 제일 큰 것이라고 믿고 자랐다.

"두만강의 개구리"였던 셈이다.

두만강은 사시사철 나의 놀이터였다.

모내기가 끝나면 논두렁에서 바지를 벗고 고기잡이를 했다.

그때는 눈 먼 고기가 있었는지 작은 수건으로 훑어내도 붕어가 곧잘
걸려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내려가다 보면 어느덧 두만강이었다.

나는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세번이나 떨어졌다.

아마도 아버지 직업이 확실치 않았고 동관 같은 벽촌에서 온 꼬마를 선뜻
받기 싫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네번째 면접때였다.

그때 나는 벌써 열한살이었다.

종성보통학교 교무주임이 직접 나왔다.

더하기 빼기를 묻는데 너무 쉬었다.

나는 일사천리로 답했다.

성적이 좋았던지 2학년에 편입하게 됐다.

어릴 때부터 "만학"이었던 셈이다.

나의 삶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일상언행을 통해 지금까지 내 가슴에 많은 교훈을 남기셨다.

어머니는 특히 여러 격언을 자주 인용했고 적절히 구사하셨다.

평소 게으름을 피우다 공부해야겠다고 수선을 피우면 어머니는 "게으른
자가 설날 아침에 나무하러 갈 채비한다"고 하셨다.

일년 내내 빈둥거리다가 하필 설날 아침에 낫이니 지게니 챙기는 걸
빗대서다.

"못된 석수장이 눈껍적이부터 배운다"는 말도 귀에 익도록 들었다.

크게 못될 석공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돌이 튀는 것을 피하려고
눈깜박이는 것부터 배운다는 뜻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잔꾀를 부리지 말라고 해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요령없는 사람이 됐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자연과 초자연 앞에서 읊조릴 줄 아는 이였다.

해마다 이른 봄이나 늦가을이면 물맑은 샘터에 가서 쌀밥과 정화수를 놓고
산신에게 우리 가족의 건강과 집안의 화목을 빌었다.

어머니 당신에 대해 비는 것은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두손을 비비며 몇 백번 절을 하면서 기원하는 그 모습, 내가 오늘날까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것은 어머님의 그 모습이 남아서다.

아버지는 삼국지 원본을 머리맡에 놓고 항상 읽고 계셨다.

가끔 의학 서적도 뒤적거리셨다.

젊은 시절에는 러시아쪽 무역도 하셨다.

특히 1차대전동안 "호황"기에는 만주에서 콩 옥수수를 구입해 일본으로
보내는 무역에도 손을 대셨다.

돈도 꽤나 많이 모았던 것 같다.

그러나 술을 좋아해 내가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때는 학비도 마련해주지
못할 정도였다.

아버지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삼국지를 즐겨 읽으면서 나와 열한살위인 형에게는
소설류 등 이야기책은 손도 못대게 하셨다.

일본어도 잘했고 세계정세에도 약간의 지식을 가졌지만 자식들에겐 도덕을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주자학적 흑백.선악논리로 어린 나를 무장시켰다.

나는 이런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5년 가까이 유학을 하며 서양문물을 접한 끝에야 비로소 천사에서 악마에
이르는 인간의 다면성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보통학교 6학년이 되니 상급학교 진학이 고민거리였다.

아버지와 나는 집안 형편을 고려해 실업학교를 택하려 했다.

특히 3년짜리인 상업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관비로 공부시켜주는 사범학교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6학년 담임이던 마장운선생은 꼭 인문계인 고등보통학교에 시험을
치라고 권유했다.

마 선생은 자신이 농업학교를 나와 사범학교 강습과에 다닌 것을 후회한다며
반드시 고등보통학교에 가서 마음껏 꿈을 키워보라고 조언해줬다.

일제강점기간만 해도 실업학교는 "규격"에 맞는 충직한 일제의 일꾼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마 선생은 내가 규격에 얽매이지 않는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내가 오늘날이 있기까지 영향을 미친 은사의 충언이 무겁다 하겠다.

어린 시절 얘기를 하자면 바다를 처음 본 충격을 빠뜨릴 수 없다.

보통학교 5학년 수학여행 때 항구도시인 청진에서였다.

야밤에 도착해 잠을 못이뤘다.

다음날 새벽, 한참을 달려 고개위에 올랐을 때 축축한 소금기가 밴 야릇한
바다냄새.

어두컴컴함 속에서 두만강과는 너무나 다른 냄새에 압도당했다.

하늘 저쪽에 엄청난 큰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끝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선은 점점 뚜렷해졌다.

수평선 아랫부분의 검푸른 것이 내 위로 다가와 막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 이것이 바다라는 것이구나.

과연 크기도 하다.

두만강은 어느 한 모퉁이나 차지할 수 있을까.

"두만강 개구리"에게 바다는 너무도 큰 세상이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