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희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 >

지금 우리가 외환위기에서 비롯된 엄청난 경제적 난국을 겪고 있는 중에도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실물부문에서의 교역증진 속도는 세계경제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다.

97년 한해만봐도 세계교역의 증진은 세계 총 GDP 증가율의 두배를
넘어섰을 정도이다.

실물부문의 교역증대 못지 않게 금융거래도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음을
본다.

특히 아시아지역에서의 금융거래 확대는 매년 8% 이상씩 증가하고 있다.

세계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경제,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돼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겪고 있는 IMF관련 국난도 따지고 보면 이렇듯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세계경제체제에서 우리가 민첩하게 적응하지 못한데에 기인한
다고 봐도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범세계화 돼가고 있는 세계경제의 구조 제도 관행을
빠른 시일내에 익히고 우리도 이에 맞춰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IMF체제를 또 하나의 외침으로 해석하고 우리의 기존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는 엉뚱한 논리를 펴기도 하는데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생각이라고 봐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 퍼져가고 있는 몇가지 반시대적 정서를
지적하고자 한다.

외환이 부족하고 환율이 높아지자 정부기관 기업체 교육기관 등에서는
외화자금을 줄이기 위해 각종 수입관련 사업을 무차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축소하는 방식이 다분히 재래식이다.

흔히 경제가 어려울 때 정보 자료 연구 개발 등이 우선 순위가 낮다고
판단되어 1차삭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위기의 경우는 다르다.

외국의 변신 노력을 제대로 파악지 못한 우리의 정보부족, 연구부족,
자료부족이 그 문제의 원천이었다면 오히려 이 부문을 살리고 종래의 필수
부문이었다고 생각되었던 것을 천착해보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을 것이다.

또 이미 약속해 놓은 국제행사를 취소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물론 외화난으로 인한 어려움때문에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나 주최측에서
초청인사들에게 어려운 상황을 소상히 알려 이해를 구하지도 않고 일방적
통보형식으로 취소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어떻게 슬기롭고 유연하게 처리해 나가느냐가 우리의 국가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해 놓고 경기장 건설여부 하나 제대로 결정못하고
있는 우리 정부의 모습은 정말 딱하다.

이것도 역시 범세계화 되어가는 지구촌 사회에서 우리의 국가적 품위를
나타내주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다.

국제전문인력 양성에 관한 사업도 그렇다.

지금 주요국제기관이나 주요국 기업체들이 대한진출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우리나라에 국제감각이 뛰어나고 외국어에 능통한 인력이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요인이 된다.

없다고 판단될 때는 이들이 진출의 방향을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로 바꿔버릴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작년부터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국제전문인력 양성
과정을 개설하여 지금 교육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이를 문제사업의 하나로 지정해 예산 삭감을 고려하고
있다니 이 또한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범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세계경제 지역경제에 대한 연구수준을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국내에는 정부가 출연한 전문연구기관과 대학중심으로 개설돼 있는 지역
연구소들이 있다.

이 기관들이 연륜은 일천하나 실력있는 전문가들을 확보하여 이제 어느
정도 연구체제는 구축해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와서 산하기관 통폐합이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띈
기관들을 없애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가살림이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

환란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얼마나 세련되고
슬기롭게 문제를 풀어 나가는 가를 세계는 예의주시하고 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합격점을 받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