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호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우리는 구조조정과 개혁이라는
단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시장경제원칙의 정착과 경제활동의 자율성보장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말들을 너무 자주 듣다보니 그 의미도 퇴색되고
실감도 나지 않는다.

벌써부터 이들이 구호로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5년동안 똑같은 단어들을 수없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새로 들어선 정부라고 해서 이러한 과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번 기회마저 놓치면 우리나라의
선진국진입은 커녕 중진국으로서의 위상마저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21세기를 바로 눈앞에 두고 우리는 경제의 총체적 개혁을 단행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이러한 과제들이 과거에 성공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개혁을 주도해나가야 할 정부가 개혁의 대상이었다는
데에 있다.

개혁의 핵심은 기득권집단의 저항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자신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으며 그 결과 개혁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 이유는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법과 제도의 정착보다는 일시적으로
국민을 현혹시키는 정치적행위에 더큰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개혁을 추진하기보다 잠시 몸을 피하거나 개혁하는
시늉만 내게 마련인 것이다.

개혁이 실패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일관성 결여다.

시장경제원칙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인위적으로 정부가 개입하는 일이
많았으며 개혁에 수반되는 고통과 비용의 크기도 정치적으로 이용됨에 따라
국민으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였다.

끝으로 개혁의 우선순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의 개혁을 순서없이 한꺼번에 추진하려다 결국 한가지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과거경험을 바탕으로 새정부의 성공적인 경제개혁 추진을 위해
몇가지 제언을 모색해본다.

첫째 이번 경제위기의 심각성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고통및 비용의 크기를 국민에게 사실대로 솔직히 알려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개혁에 동참하는 국민의 마음가짐이 계속해서 유지될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해 신뢰를 갖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부터 개혁에 솔선수범을 보여야 하며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일관성을 철저히 유지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편으로는 시장경제원칙과 경제활동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가 지시하고 간섭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법과 제도의 정착을 통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각 경제주체들도 능동적인 변신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셋째 이번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경제적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초기에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경제의 총체적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줄수 있는 궤도(path)가
여러개 있는 것이 아니다.

초기에 충격을 가하지 않고서는 최적의 궤도에 안착할수 없으며 그렇게
될 경우 우리가 치러야할 비용은 훨씬 더 커질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넷째 개혁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중요한 것부터 추진해야 한다.

경제원론이 가르쳐주고 있듯이 모든 목표함수의 최적화는 가용재원과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된다"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무리하게
밀어붙인다면 비효율과 낭비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할수 있는
능력과 실력을 갖춘 새로운 인재들을 개혁추진의 첨병으로 기용해야 한다.

최근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21세기형 문제들이다.

파생금융상품의 등장, 적대적 M&A의 보편화, 독과점방지법의 역외적용,
전자상거래의 확산 등 새로운 국제 경제이슈들이 국내 경제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급변하는 세계경제변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효과적인
국가경제운영이 어려운 시대다.

끝으로 정부 밖으로부터의 비판과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모든 정부부처는 자기부처와 관련된 부정적인 자료와 보도가
최고 통치자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데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쓴 것이 사실이다.

이제 청와대 비서실부터 외부의 건설적인 비판과 조언을 대통령에게
가감없이 전달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새정부가 해주었으면 하는 것은 과거 정부에 주문한 사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각 경제 주체들로 하여금 정부를 신뢰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는 언뜻 듣기에 쉬운 주문 같지만 실제 새정부가 할 일중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질때 우리 경제는 개혁의 최적궤도에 성공적으로
안착할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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