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8월31일.

A은행 이사회 회의실.

상임이사들간에 논의가 한창이다.

안건은 B그룹의 재무구조개선약정 준수여부.

B그룹이 6개월전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하면서 매각키로한 계열사가
팔리지 않았는데 이를 약정위반으로 봐야 하느냐가 논제였다.

"지난 2월말만해도 B그룹이 상반기중 팔기로한 C기업이 금방 팔릴 것으로
판단, 승인했다. IMF(국제통화기금) 한파로 인해 팔리지 않고 있으니 충분히
감안해 줘야 한다"(여신담당 상무)

"그렇게 따지면 어느 그룹이 이유를 대지 못할 것인가. 결국 약정이 모두
유야무야 되고 만다. 조치를 취해야 한다"(자금담당 상무)

앞으로 6개월후의 가상현실이다.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은 그룹이 당초 계획을 이행치 못했을 경우 과연
어디까지 "정상참작"을 해줄 것인지가 논란이다.

만일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면 약속대로 여신회수와 신규여신
중단조치를 밟을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기업이 가야할 길은 하나다.

망하는 것이다.

이처럼 재무구조개선약정이 안고 있는 약점은 많다.

기업들은 5년동안의 자금수급계획서를 단1주일만에 만들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신이 아니면 5년후까지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들다.

판단기준도 없다.

아무 기준도 없이 약정을 맺어버렸고, 아무 잣대도 없이 그 결과를 판단
하는건 아무래도 무리다.

자칫하면 "귀에 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재무구조개선약정이 아니다.

약정은 은행의 기업지배를 위한 첫 단추에 불과하다.

시행과정에서 오류가 생길 경우 바로 잡으면 그만이다.

더욱 큰 문제는 과연 은행이 기업을 지배할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다.

당장 여신심사능력이 의문이다.

지난해말 현재 국내 33개 은행이 6개월이상 이자를 한푼도 받지 못하는
여신만 32조2천8백91억원에 달한다.

총여신의 무려 6.1%가 사실상 부실여신이다.

은행들의 심사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다.

여신사후관리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일단 돈이 나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기업이 그돈을 부동산에 투자하든, 아니든 은행들은 오불관언이다.

그저 사무실에서 서류만 받아 보는게 고작이다.

한보사태가 대표적이었다.

여신심사능력부터 이렇다.

그러니 은행들이 기업 전체, 나아가 대기업의 경영을 지도하고 감시할
능력이 있는지를 의심받는건 극히 당연하다.

망해가는 은행이 건전한 기업을 지배하는 격이 될것이다.

"대출서류심사능력조차 의심받고 있는 은행이 섣불리 기업경영에 간여하려
했다간 오히려 부작용만 낳을수도 있다"(유태호 대우경제연구소 상무).

더욱이 기업들의 탈은행화는 이제 대세다.

지난 96년 1.4분기중 기업들이 자기신용으로 자본시장에서 조달한 직접
금융은 전체 조달액의 55.0%에 달했다.

반면 은행을 통한 간접금융은 24.2%에 불과했다.

비록 지난해 1.4분기중 경기침체로 은행의존도는 42.3%로 높아지긴 했지만
틈만 나면 은행에서 벗어나려는게 기업들이다.

기업들의 은행의존도는 줄고 있는 터에 은행들이 기업을 지배하려는건 뭔가
어색하다.

더욱이 기업을 지도하고 감시할 능력이 의심받고 있는 터여서 더욱 그렇다.

가진 것이라곤 채찍(여신중단)밖에 없는 은행들이 자신보다 덩치가 큰
대기업에게 "한수 가르치겠다"는 것으로밖에 볼수 없다.

따라서 은행과 기업의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선 환경조성이 우선
돼야 한다.

은행은 심사능력을 길러야 하고 협박이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기업을 감시
해야 한다.

그러자면 은행의 자율성확보가 필수적이다.

정부가 은행과 기업이 신뢰할수 있는 제도를 먼저 정비하는게 우선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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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침 ] 지난 2일자 ''은행 지배시대'' 시리즈 (1)에 게재된 재무약정 체결
대상기업중 대동주택은 화의법정관리 신청기업이 아니므로 바로잡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