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노력이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거대한 전쟁이 진행중이었지만 정부의 그 누구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 전쟁의 본질을 알아채지 못했다.

재경원은 막판에 가서야 밀사 작전을 포함한 그랜드 디자인(Grand Design)
이라는 이름도 거창한 계획을 만들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것이었다.

일본계 은행들의 대출금 회수가 본격화되던 지난해 11월6일 오후 늦은 시간
엄낙용 차관보(현 관세청장)가 강경식부총리 집무실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일본에 다녀와야겠습니다"라고 엄차관보가 입을 뗐다.

엄차관보는 "일본으로부터 양자협력 차원의 자금을 빌려보겠다. 일본은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을 추진중이므로 우리에게 전혀 협상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는 점을 설명하고 일본행 재가를 받았다.

엄차관보가 일본행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11월9일(일요일).

재경원의 금융정책실 관계자들은 부총리실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월스트리트저널 등 해외언론들은 한국이 총체적인 부도과정에
들어섰다고 써대는 중이었다.

일과를 끝낸다며 기자들을 따돌린 재경원 간부들은 인터콘티넬탈호텔에
다시 집합했다.

재경원 관계자외에 김인호 경제수석이 참석했다.

"재경원이 그랜드 디자인이라고 이름붙인 총체적인 외환위기 극복 프로그램
이 이날 밤에 만들어졌다. 이 회의에서 IMF행을 비롯한 가능한 모든 방안들
이 협의됐다"고 윤증현 금정실장은 증언했다.

오후6시30분부터 시작된 회의는 9시30분 확대회의로 연장되어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계속됐다.

장소도 일식집에서 비즈네스 센터로 옮겨졌다.

확대회의에는 강경식 부총리, 이경식 한은총재, 김인호 경제수석, 이영탁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윤증현 금정실장, 윤진식 청와대 비서관 등이 참석
했다.

"그랜드 디자인은 한은의 지원(back-up facility)으로 은행들이 해외차입을
시도하기로 한 종전대책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만든 것이었다.

그 대신 정부가 예금보험 공사에 출자하고 이를 토대로 약 1백50억달러
어치의 담보부증권(ABS)을 해외시장에서 발행하자는 것이 골자였다"(재경원
이 감사원에 제출한 대외비 문건)

재경원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력에 의한 해결에 미련을 두고 있음이 분명
했다.

또 1백50억달러 정도면 외환위기를 막을수 있다고 판단했었다고 김인호
수석은 증언했다.

물론 둘다 잘못된 계산에 기초해 있었다.

"은행들의 크레딧 라인이 모두 끊어지고 난 다음에야 한은 차입을 검토한
것도 한발 늦은 조치였지만 국채(ABS)발행 계획도 이미 물건너간 다음이었다.
늘 한발씩 늦었다"는게 한은 국제부 관계자의 뒷날 설명이었다.

다음 날인 10일 김기환 대사는 강부총리의 긴급 호출을 받고 오찬을 함께
했다.

다음은 김기환 대사의 증언.

"강부총리는 "아시아를 순방중인 캉드쉬 총재를 만날 준비를 하라. 주말에
한국에 와도 좋고 사정이 좋지 않으면 강부총리가 제3국에 나가서 만나도
좋다. 반드시 비밀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한편 일본과의 양자협력을 끌어내는 이중의
전략이었다.

소위 그랜드 디자인은 이 양동전략에 뒷받침되어 있었다.

김기환 대사와 엄낙용 차관보가 밀사였다.

물론 금융개혁법을 통과시켜 국제신뢰를 회복한다는 국내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러나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엇보다 설계의 잘못이 컸다.

설계자들 만이 그것을 모를 뿐이었다.

11일 화요일, 엄차관보는 우중충한 외양의 대장성 빌딩으로 들어섰다.

사카키바라 일본 대장성 재무관(차관)은 그동안의 활달하던 모습과는 딴판
이었다.

"중국과 손잡고 미국을 혼내주겠다"(96년 주일 미 대사관 관계자들과의
만찬자리 발언)던 호기방장한 사카키바라였다.

협상은 우려했던 대로 결렬이었다.

루빈 미 재무장관이 보낸 한장의 편지가 미쓰즈카 대장상 앞으로 날아와
있었다.

소위 루빈 레터는 "미국은 한국금융위기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우려하고
있다. 일본 금융시스템의 개선과 강력한 경기부양을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적 표현마저 생략한 협박 그 자체였다.

"사실 큰기대는 안했지만 절망감이 느껴졌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감이 왔다. IMF로 가기전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이 희망이 깨진 것이었다"
라고 엄차관보는 회고했다.

엄차관보는 "사카키바라 재무관은 "일본도 어렵다. 정부차원의 양자협력은
더욱 어렵다. 상업차원의 협조는 해보겠다. 그러나 기대는 하지 말라"는
요지의 말로 거부입장을 분명히 했었다"고 증언했다.

일본을 움직여 금융위기를 돌파한다는 전략은 이렇게 간단히 무산되고
말았다.

익명을 요구한 재경원 고위 관계자는 "당초 아시아 금융위기는 전적으로
루빈 재무장관이 기획하고 진행시킨 것이었다"고 말해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정부는 너무 몰랐다. 미국과 일본 유럽 3자 사이에 거대한 주도권
싸움이 진행중이었던 터에 우리는 미국이 아닌 일본에 매달렸다. 그것은
엔과 달러, 유로(유럽 단일통화)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다"라고 미국
금융 사정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분석했다.

10월 중순에는 AMF 설립안이 구체화되는 등 사태진전이 없지 않았다.

"총 1천억달러를 조성하되 일본이 50%를 부담한다. 홍콩 중국 한국 등도
각기 10% 남짓을 부담한다"는 구체안까지 그려졌었다.(엄낙용 차관보 증언)

그러나 이미 일본과 중국이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일본은 4개은행과 3개 증권사 1개 보험사가 차례로 문을 닫는 중이었다.

중국은 10월26일 강택민 국가주석이 미국을 공식 방문, 30억달러의 보잉기
를 구매키로 하고 AMF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미국에 전달해 둔 상태였다.

엄차관보가 일본을 방문하던 싯점에 루빈 재무장관은 미 언론과의 회견을
통해 "일본이 미국국채(TB)를 대규모로 팔아치우더라도 국채가격이 폭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호언하고 있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일본은 무려 6천억달러 어치의 미재무성 증권을 팔아치우겠다며 미국을
협박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미국의 우위는 확고했다.

"사실 일본 자신이 어려운 국면이었다. 일본 최대인 도쿄미쓰비시은행만
하더라도 지난해 연초에 12.5bp이던 조달금리가 11월에는 70bp까지 급등해
있었다. 자칫하면 일본 자신이 당하는 국면이었다"고 재경원 국제금융국의
한 간부는 밝혔다.

엄차관보가 일본에 가던 날 한국정부는 답답하게도 AMF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우물안 개구리였다.

이번에는 김기환 대사 차례였다.

김대사는 12일부터 15일까지 4일간 일정으로 환태평양경제협의회에 참석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시기에 같은 지역을 돌고 있던 캉드쉬를 만나라는 강부총리의 구체적인
밀명이 내려왔다.

다음은 김기환대사의 증언.

"미리 지시는 받고 있었지만 13일 저녁 캉드쉬 총재를 만나라는 긴급연락이
왔다. 다음날 아침 연락을 해보니 이미 약속이 꽉차 있었다. 캉드쉬총재가
따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그가 방문하는 태국 중앙은행 건물로 찾아가
옆방에서 잠시 만났다. 14일 오후 7시였다. 한국 사정이 다급하다고 설명
하고 일요일(16일)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대사는 17일엔 다시 미국으로 날아가 골드만삭스 등 월가의 금융기관을
연쇄 방문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다시 엄차관보의 순서였다.

16일밤 서울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깡드쉬와의 6인 회동에 참석했던
엄차관보는 다음날인 17일 이번에는 아세안등 재무차관회의가 열리는
마닐라로 날아갔다.

미국에서 서머스 재무부부장관, 일본에서 사카키바라 대장성 재무관,
스탠리피셔 IMF 부총재 등도 참석했다.

엄차관보는 회의장에 면한 옆방으로 서머스차관을 불러내고 또다른
방으로는 사카키바라를 모셔와 한국에 대한 양자차원의 협력을 요청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다.

다음은 엄차관보의 증언.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들
(서머스 부장관, 스탠리 피셔 부총재 지칭)은 바로 전날 서울에서 있었던
캉드쉬 총재와의 극비회동 합의사항등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더 무엇을 말할수 있었겠나"

마닐라 회의에서 사카키바라는 아시아판 IMF 창설안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일본의 완패였다.

이렇게 해서 "엔 경제권을 구축해 보겠다"는 일본의 야망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엄차관보는 18일 저녁 비행기를 놓쳐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강부총리 경질 소식을 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이 비행기에는 가이스너 미 재무성 차관보와 스탠리피셔
IMF 부총재도 올라 있었다.

일본을 잠재운 이들에게 이번에는 서울로 날아가 한국문제를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밀사들은 이렇게 미 재무성 관계자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정규재 김성택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