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즉위년(1450) 7월20일에 왕세손 홍위를 왕세자로 책봉하니 이때
세자의 나이 10세였다.

9월17일에 처음으로 왕세자의 서연을 열어 "소학"을 진강하게 되는데, 이때
25세의 좌사경 유성원과 24세의 우사경 이극감이 세자의 시학이 되어 세자와
붕우의 예로 친교를 맺으며 허물없이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라는 왕명을 받게
된다.

그 내용을 "문종실록" 권 3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처음에 상감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내가 동궁에 있었을때 박중림과
최만리가 시학이 되었었다. 이제 이 예에 의거하여 서연관에서 쓸만한
사람을 선택하도록 하라"하니, 승지들이 서연 당상으로 하여금 선발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하연, 정갑손, 허후 등이 유성원과 이극감으로 들려 드리자, 상감이
이르기를 "이 두사람은 모두 신진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의정부에 명하여 경연과 서연에 구애받지 말고 다시 헤아려 듣게 하라"
한다.

이에 노숙동 김예몽 유성원 이극감을 비교하여 고르도록 아뢰니, 상감이
드디어 유성원과 이극감으로 정하면서 이렇게 하명하였다.

"지금 너희들로 세자 시학을 삼고 또 세자로 하여금 붕우의 예로 대하게
하였으니 너희들도 또한 붕우와 같이 보도록 하여 위축돼서 말을 다하지
않도록 하지 말라.

그 경서의 의리나 고금의 격언을 조용히 상세하게 말하여 깨우치는 바가
있게 하며 매일 들어와 시강하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유성원은 왕세자에게 친구 같은 스승이 되어 뒷날 단종이 되는
왕세자와 가장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다.

이날 대자암 극락전의 중수가 완성되었는데 사치스럽고 아름답기가 궁극에
이르러 금벽 단청이 휘황찬란하였으며, 이날 경찬 법석에도 수양대군을
비롯한 대군 제군들이 모두 참석하였었다고 한다.

문종 원년(1451)에도 유성원은 여전히 집현전 수찬으로 세자 서연관
좌사경을 겸하며 세자의 시학이 되어 매일 동궁에 출사하여 왕세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문종은 왕세자 시절에 워낙 공부에 힘써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오경과 "좌전" "대학연의" 등을 4~5차례나 되풀이하여 진강하고 기타
경사자집에 속하는 모든 책들을 읽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라서 그 학문이
매우 넓고 깊었었다.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였었고 문장력도 뛰어나 승정원에서 작성한 전지와
유서의 내용이 미흡하면 손수 이를 다시 지어 내려보낼 정도였으며 글씨도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사람들이 조각 종이에 쓴 한두 글자라도 다투어
가져다 보배로 삼았었다("문종실록" 권 9, 원년 신미 9월1일 병신조)

그러니 이런 문종의 눈에 들 만큼 왕세자를 보도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유성원은 그 시학의 임무를 만족할 만큼 이행해 나가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유성원은 문종으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아 비록 어린 나이지만
"고려사절요"의 편찬에도 참여하게 되었던 듯, 문종 2년(1452) 2월20일에는
우의정 김종서가 감춘추관사로 있으면서 "고려사절요" 35권을 지어 바치는데,
이때 유성원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문종은 이미 세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등창이 나서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래서 세종이 정무를 친결하다가 과로로 쓰러졌던 것인데, 이즈음 겨우
아물어가던 등창이 초상을 치르느라 과로와 비통으로 다시 터져 문종 원년
11월14일에는 거동이 불편하여 움직일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결국 11월15일의 삭망 제사를 지낼수 없게 되고 11월16일에는 찌르는 듯
아픈 통증을 견디다 못해 밤에 거머리를 붙여 고름을 빨아내고서야 조금
나아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신정의 기반을 다지려 점심을 거를 정도로
무리를 하며 밤에도 신하들을 접견하는 야대법까지 세우려 하니 병근이
떨어지지 않아 등창을 짊어지고 살게 된다.

드디어 문종 2년 2월17일 세종의 대상을 치르면서 15일에 능제사를 지내는
등의 과로가 겹쳐 등창이 크게 악화되어 가는데,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세종 이래로 수십년 동안 세종 부자를 성심껏 치료해 오던 내의 노중례가
3월 11일에 세상을 떠나게 되니 문종의 병세를 다스려줄 믿을 만한 어의가
전무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늘 앓던 병이라 생각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며 온갖 정사에
골몰하니, 3월9일에는 왕세자빈을 간택하기 위해 8세에서 15세의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고, 3월11일부터 내전에 친림하여 처녀를 간택하기 시작한다.

4월16일에는 세자빈 간선 기준을 마련하고 간선을 서두르기 시작하여 4월
18일과 22일에 연속해서 간선을 치른다.

그러나 미처 3간택을 치르기도 전인 4월24일에 등창이 크게 악화되어
25일에 치르기로 한 대상후 최초의 회례연에 국왕이 친림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병세가 위중해지는데도 내의 전순의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치료를 소홀히 하다가 5월3일에 이르러서야 등창 종기가 심상치
않음을 대신들에게 알리게 된다.

이에 5월4일부터 모든 정무를 의정부에 직접 보고하게 하고 안평대군을
대자암으로 보내 기도를 올리게 한다.

5월5일에는 종묘, 사직과 소견전, 삼각산, 백악산, 목면산으로 사람을
보내 기도하게 하고 내의 전순의는 은침으로 고름을 짜고 콩국을 드리는
처방으로 일시 통증을 진정시키지만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자 5월14일에는
집현전 학사로 의학에 정통한 김예몽과 유성원이 내의들과 사정전 남쪽
회랑에 모여 의서를 상고하여 치료법을 강구하게 된다.

그러나 문종은 이 날을 넘기지 못하고 유시(오후 5~7시)에 경복궁 강녕전
에서 돌아가고 만다.

이때 문종의 나이 39세였다.

이에 왕세자가 5월18일 경복궁 근정문에서 불과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하니 이 분이 비운의 임금 단종이었다.

문종은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정사를 의정부
대신들이 전결하도록 유명을 내리고 어린 임금을 보호하다가 장성하면
대권을 이양해 주게 하였다.

수양대군의 야심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종의 병세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간 것도 내의 전순의가 수양과
결탁하여 흉수로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던 듯하니, 문종이 돌아가고 나서
전순의의 처벌 상소가 빗발치듯 하였으나 사형을 면하고 나서 수양대군이
대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신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를 문종의 졸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때 안과 밖이 서로 통하지 않고 오직 내의 전순의와 변한산 최읍이
날마다 나가서 살피는데 모두 용렬한 의원들이라 증후도 알지 못하며 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상감으로 하여금 활쏘는 것을 구경하게 하고 사신을 접대
하는 연회에 나가게 하여 종기가 곪아 터지자 순의 등은 은침으로 종기를
째고 고름을 여러 홉을 짜내어 통증이 조금 그침에 밖에 드러내 말하기를
3,4일만 기다리면 곧 나을 것이라 하고 의정부와 육조에서 기거를 문안하면
다만 상체가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 날마다 좋아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날 아침에 순의 등이 나가 살피고서는 상체가 위급한 것을 비로소 알고
세자에게 아뢰니, 세자가 이르기를 "나는 나이 어려 어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니 의정부 대신들은 속히 내정으로 들어와 문후하도록 하라"고 하자
의정부 대신들이 모두다 근정전 뜰로 나오고 진무로 하여금 성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며, 사면령을 내리고자 하여 세자로 하여금 아뢰게 하니 상감은
이미 말을 할 수 없어 다만 "하지 말라(불가)"고 말하였다.

이때 수양대군이 외정에 있다가 통곡하면서 "어째서 청심원을 드리지
않느냐"고 외침에 전순의 등이 비로소 드리려 하였지만 이르지 못하고 조금
있다가 상감이 돌아가셨다"

전순의 등 내의들이 문종의 병환을 외부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듯 가장하며 등창에는 가장 해로운 활쏘기나 연회를 권하여 종양을
깊이 곪게 한 다음 이를 은침으로 따서 한꺼번에 여러 홉의 고름으로
빼내었다 하니 이는 고의로 병세를 악화시키려는 음모가 아니고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수양대군이 이미 문종의 목숨을 구할수 없게 된 사실을 확인한 순간 통곡
하면서 어째서 청심원을 드리지 않았느냐고 외치고 나선 것도 자못 혐의쩍은
일이다.

문종은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의학에 두루 통달한 대학자였다 하는데
어떻게 이토록 당신의 병환은 전순의와 같은 흉수들에게 맡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던지 정녕 천명이란 어쩔수 없는 일인가 보다.

남을 자신처럼 믿었던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을 것이다.

문종은 학문뿐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었고 글씨는 조송설체에 왕희지체를
섞어 썼는데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활솜씨 또한 신궁으로 불릴 지경
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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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림 : 주간연재 "충의열전"을 지면사정으로 중단합니다.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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