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사.하이터치 공동기획-

이면우 <서울대 교수>

우리는 매우 창의적인 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세종대왕 이후 6백여년 동안 국가차원에서 창의적인 노력을
해본 적은 몇 번이나 있는가.

세종대왕은 동래현의 노비였던 장영실을 발탁하여 벼슬을 주고 과학기술
문물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세력들은 공주의 가마를 잘못 만들었다고 누명을 씌워
모함하였고, 그는 그동안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결국 곤장을 맞고 쫓겨났다.

18세기에 과학기술중흥을 주장하였던 실학파 학자들은 모두 귀양살이를
하였거나 참형을 당하였다.

실학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던 정조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창의성이 높다.

지방관청의 노비이던 장영실은 일할 여건을 만들어주자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 않았는가.

실학파들도 농업 어업 축산업에서 서양문물을 능가하는 창의적인 제도를
많이 제안하였었다.

그러나 창의의 싹이 돋을 때마다 이를 권장했어야 할 집권층들이 나서서
방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족의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여러분의 자식들이 창의적 재능을 보인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자식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적극 말렸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눌려왔던 민족의 창의성을 분출하기에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

우리가 맞고 있는 이 시대는 정보혁명과 자유무역이 동시에 전개되는
급변기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창의적 노력이 필요한 5가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이제 우리는 모방할 수도 없다.

기술의 발전속도가 완만하였던 산업혁명시대에는 고정표적이 많았다.

일본은 고정표적을 잘쏘는 선수이다.

그러나 급변의 시대에는 이동하는 표적이 많아지는 법이다.

일본의 산업경쟁력이 주춤거리는 것도 이동하는 표적은 모방과 개선의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창의적 노력이 불가피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방할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단절의 시대, 급변의 시대는 우리에게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분방한 생각과 흩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심성이 우리의
창의적 사고에 가속도를 붙일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정보시대는 새로운 산업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정보사회의 전개는 지금보다 약 5배가 더 넓어진 사업영역을 제공할
것이다.

깃발만 들고 다니며 꼽고, 새끼줄만 갖고 다니며 울타리를 쳐 놓으면
우리 것이 되는 기회의 시대이다.

넷째 새로운 영역이 전개되는 시대에는 한가지의 고유영역만 보유하고
있어도 국제협력이 가능하다.

전세계에 줄 것이 있는 나라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서 안전을
보장받는다.

다섯째 우리산업은 세계적인 대규모 양산설비를 보유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의 생산활동은 바이어의 주문대로 만들던 주문지부착생산
(OEM)체제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양산설비와 창의성이 합쳐진다면 우리가 만든 신제품은
전세계 바이어들이 공급받으면서 판매하는 독창적인 주문판매체제
(OBM : Original Brand Manufacturing)를 구가할 것이다.

창의적 결실을 맺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사고를 전환하여야 하는가.

사고를 혁신하고 발상을 전환하여야 한다.

사양산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사양기업만이 있을 뿐이다.

첨단기술이 첨단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며 창의적 사고가 기존기술과
합쳐 첨단제품을 만드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의 창의적 자질을 증명하고자 필자는 1980년부터 창의성이 강조되는
고부가제품(High Touch Product)개발을 추진하여 왔다.

산학협동으로 진행된 연구과정에서 필자는 우리 젊은이들의 창의적 자질이
매우 높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하였다.

다음의 몇가지 증거를 예시하고자 한다.

82년에 운전자의 체형에 따라 최적 운전자세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운전석을 개발하였다.

이 운전석은 세계최초로 컴퓨터가 내장된 것이며 파리~다카르를 달리는
국제자동차 대회에서 경주용 의자로 추천되었다.

88년에 개발된 인공지능형 TV, 음성인식 전자레인지,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자주형 진공청소기는 뉴욕 타임스에서 21세기형 미래상품으로 선정되었다.

89년에 손목 피로를 덜어주는 파도 모양의 키보드도 개발되었다.

4년 뒤에 미국회사에서 이와 비슷한 키보드를 만들었는데 이 제품은
출시후 첫해에 1조원이 넘는 매출액을 기록하였다.

90년에는 3세 어린이가 쓸수 있는 유아용 컴퓨터를 세계최초로 개발하였다.

이 제품은 국내 유치원에서 유아들의 컴퓨터 교육용으로 큰 호응을
얻었으며 세계 컴퓨터 전시회에 소개되어 8개국으로부터 수출의뢰를 받았다.

94년에는 레저 스포츠용 캠코더를 세계최초로 개발하였으며 이 제품은
디자인전에서 수상하였다.

95년에 세탁물 종류와 양에 따라 세탁봉의 높이가 조절되는 새로운
개념의 세탁기를 개발하였다.

이 제품은 출시 3개월만에 시장점유율을 8% 높였으며 96년 히트상품으로
선정되었다.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조리대가 상하로 움직이는 전자레인지도
세계최초로 개발하였다.

이 제품은 단기간 내에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였으며 높은 가격을
받으며 수출이 늘어나고 있다.

96년에 개발된 정수기는 97년 히트상품으로 선정되었으며 세계각국으로
수출물량이 늘어나고 있다.

이 정수기는 우리가 가격 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익을 내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보다 높은 이익률을 내고 있다.

96년에 개발된 새로운 개념의 4계절용 에어컨은 여러 방에서 번갈아
쓸수 있으며 설치도 매우 간편하다.

이 제품이 개발된다면 동남아 시장에서만도 약 5조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97년 반도체 회사와 공동으로 개발한 멀티미디어용 반도체 소자는
1품20조원의 매출액을 올릴 것으로 추정되었다.

필자는 이와 비슷한 개념의 제품이 미국에서 2000년을 목표로 개발되고
있음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제품개발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해외유학 경험도 없고, 석.박사
학위도 없으며, 명문대 출신들도 아니었다.

이렇게 개발된 제품들은 필자의 전공과도 관계가 없었다.

필자가 한 일은 젊은이들의 심성을 자극하면서 더이상 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자, 선진국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자, 선진국보다 비싼 제품을 만들자고
강조하였을 뿐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신바람나게 연구하였으며 폭발적인 창의성을 시위하였다.

분위기만 만들어 주면 이렇게 결실이 많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까지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창의적 결실을 자주 접하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시도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필자의 원고작성을 돕고 있던 대학원생과 우연히
필자를 방문한 제자가 황당한 제안을 하였다.

왜 창의가 모방보다 쉬운지 알기 쉽게 열가지 이유만 대어 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경황없이 나온 것이 창의 십계명이다.

1) 모방은 남의 그림자를 똑같이 따라하려는 것과 같고, 창의는거울
앞에서 마음놓고 온갖 표정을 짓는 것과 같다.

어느 것이 더 쉬운가.

2) 모방은 시작은 쉽지만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창의는 시작은
어렵지만 뒤로 갈수록 쉬워진다.

3) 모방은 하면 할수록 주위로부터 멸시를 받게 되나, 창의는 반복할수록
주위의 존경을 받게 된다.

4) 모방은 큰 돈으로 시작해야 하지만, 창의는 무자본으로 시작할수 있다.

5) 모방은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지만, 창의는 경쟁자가
없으므로 하는 일마다 일등이다.

6) 모방은 하면 할수록 로열티 지불액이 늘어나지만, 창의는 하면 할수록
로열티 수입이 많아진다.

7) 모방은 하면 할수록 찾아다니며 사정할 사람이 많아지지만, 창의는
하면 할수록 찾아와서 사정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8) 모방은 신문사를 찾아가 광고비를 내야 게재되지만, 창의는 돈을 내지
않아도 제발로 찾아와 대서특필해 준다.

9) 모방은 게으른 사람의 체면을 유지해주는 제도이고, 창의는 부지런한
사람이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제도이다.

10) 모방은 제아무리 큰 노력을 들이더라도 결국은 망하지만, 창의는
한가지만 잘 되어도 성공한다.

이상의 십계명은 제자들 앞에서 체면을 지키기 위해 급조한 내용이다.

속담중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필자가 열가지를 열거하였으니 여러분들도 잠시 똑똑한 학생이 되는
셈치고 창의가 모방보다 쉬운 1백가지 이유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떤가.

우리의 기업구조는 창의적인 사람이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포드가 만든 조립공정은 작업자의 숙련도가 높더라도 이를 반기지 않으며
오히려 비숙련공의 평균수준에 맞추어 운영되는 생산방식이다.

즉 관리효율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기업의 관리제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남보다 창의성이 높은 사람도 원치 않고 평균수준보다 낮은 사람도
허용하지 않는다.

창의성이 높은 사람은 이것저것 새로운 생각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의 관리체제는 이를 원치 않는다.

창의적 제안내용이 직렬회로를 거치고 꽃마을 회의에 회부될 것을 걱정하는
상사는 "쓸데없는 생각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하라"고 면박을 줄 것이다.

창의력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창의적 노력을 포기하고 시키는 일만 하거나 좌절하고 실망하다가
회사를 떠날 것이다.

필자의 경험을 소개하였듯이 우리는 매우 창의적인 민족이다.

이제 잠자고 있는 우리의 창의력을 폭발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대책이
수립되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고목나무의 소생방안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흩어져야
한다.

관리효율을 강조하는 큰 항아리(Pot 1)와 창의성을 강조하는 작은
항아리(Pot 2)로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항아리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급하는 가상연구소
(Virtual Institute)를 만들어야 한다.

왜 가상연구소라고 하였는가.

첫째 새로운 기술과 신규사업을 상상하며 창조하여야 하는 연구소이기
때문이다.

둘째, 미래사회에서 요구되는 기술의 필요성을 남보다 먼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샛째 한 제품으로 조단위의 매출을 목표로 하는, 즉 1품 1백조, 1품 50조,
1품 10조원의 상품을 남보다 먼저 상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러사는 일반주택의 낮은 차고에도 들어갈수 있는 미니밴
(Minivan)을 개발하여 1품 1백조원의 히트상품을 만들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필립스사의 면도기 1품 30조, 스와치사의 손목시계
1품 20조, 소니사의 게임기 1품 10조 등 히트상품의 행진이 줄을 잇고 있다.

이제 기업과 대학은 가상연구소의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

전국의 가상연구소에서 개발된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한국형 벤처산업을
창출하는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