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사.하이터치 공동기획-

이면우 <서울대 교수>


우리산업이 1960년대 이후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인 것은 그 시대에
활약했던 기업인들이 한가지 사업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대기업 회장들의 회고록을 보면 사업 초기에는 현장 사정을 손금같이
알고 있었다.

생산이 시작되면 아예 공장에서 거주하였으며 애로공정은 물론이고 말단
신입사원의 이름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당시에 사원으로 일했던 역군들은 칭찬도 회장 면전에서 직접 받았고
질책도 그 자리에서 받았다.

고생은 말할 수 없이 많이 하였으나 보람과 성취감이 충만하였다.

그후 계열회사가 늘어나면서 회장은 신규사업 진출과 계열사간의 협력등
큰 업무에 주력하게 되었고 개개 회사의 업무에는 시간을 할애할 수 없게
되었다.

회장이 직접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업무가 많아지자 기업의 경영진은
구성원의 의견종합과 관리체제의 확립을 위해 모든 업무의 진행이 직급별
부서별로 전기회로같이 얽혀있는 결재 과정을 구축하였다.

직급별로 결재를 받는 과정은 직렬회로와 같고,여러 부서 담당자가
둘러앉아 토의하는 위원회는 꽃모양을 닮았다.

꽃마을인 것이다.

우리 기업의 의사결정은 절차와 양식이 복잡하다.

담당 사원이 기안을 하면 대리가 결재를 하고, 대리는 과장에게 보고하며,
과장은 부장에게 결재를 받는 절차를 거쳐 임원 사장에게까지 전달된다.

직렬회로인 것이다.

직렬회로의 특성은 무엇인가?

가령 사원이 기안한 내용을 상급자가 결재할 확률이 90%라고 가정하여
보자.

이 업무가 20명의 결재 참여자를 거쳐 사장의 결재를 맡을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0.9의 20제곱, 즉 0.1에 불과하다.

즉 90점짜리 입력이 반복되어 진행되면서 최종 출력 점수는 10점으로
떨어지는 파괴적인 시스템이다.

만일 결재과정에서 어느 한 사람이 보류를 시키면 그 일은 무한정
지연되고, 한사람만 반대하여도 그 사안은 안개속으로 사라지기 십상이다.

또한 한사람이라도 해외 출장중이거나 연수교육에 참여하고 있으면
피치못할 지연이 반복하면서 시기를 놓쳐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직렬로 연결된 결재과정을 따라가며 발생하는 업무의 지연과 내용 변질은
꽃마을을 맞아 더욱 악화된다.

업무를 추진하다 보면 관련 부서가 모여 공동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가 많다.

각 부서의 실무자로 구성된 실무회의,부서장끼리 구성한 협의회,
관련임원들이 최종적으로 토의하는 운영위원회 등이 이러한 성격의 회의이다.

필자는 신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와같은 위원회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다.

산.학협동 과정에서 신제품이 개발되면 관련부서 회의로 회부된다.

같이 모여서 검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연구소에서는 양산설계가능성을 검토하고, 생산부서에서는 설비현황과
부품조달을 따져보며, 영업부서에서는 예상 판매량을 산출한다.

개인적으로는 신제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관리자들도 일단 회의장에
들어서면 태도가 달라진다.

부서의 실무자는 회의에 참석하는 부서대표에게 업무가 늘어나지 않도록
부서의 입장을 잘 대변해 달라고 부탁한다.

부서의 책임이 늘어날 사안은 함부로 양보하지 말아 달라고 주의한다.

위험부담이 있는 업무는 신중하게 결정하자고 의견을 종합한다.

소속부서로부터 이런 지침을 받고 나온 부서대표들이 모여 하는 회의는
진행이 순조롭지 못하다.

연구소에서는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Not invented here)"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며, 생산부서는 현재 라인에서 생산되고 있는 제품의
목표생산량 달성도 힘겹다고 호소한다.

판매부서는 이와 비슷한 제품이 없어 판매예측을 할 수 없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결론을 얻지 못해 필자가 최고경영자를 찾아가 하소연하면 관련부서
회의에서 문제점 제기가 많은 것을 보니 아주 확실한 신제품은 아닌 것
같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꽃마을인 것이다.

꽃마을에는 발언순서가 일정하다.

핵심부서의 직급이 높은 사람이 제일 먼저 발언한다.

지원부서에서 나온 직급이 낮은 사람은 되도록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모두들 발언순서에 신경을 쓰면서 실무자의 의견 청취보다 상급자의
의중을 헤아리는데 온 신경이 집중된다.

꽃마을에는 상부상조 정신이 강하다.

지난번 회의때 상대부서의 사정을 우리가 이해하였듯이 이번에는 우리부서
입장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한다.

상대부서 의견을 무시하고 너무 밀어붙이면 사후에 부작용이 생긴다.

필자가 개발한 신제품을 보류시키는데 성공한 사업부장은 득의양양하였다.

회장에게 보고해도 별수없다고 하였다.

그는 회장 지시사항도 1년간이나 보류시킨 적이 있다고 전적을 자랑하였다.

꽃마을에는 회의가 많다.

복잡한 시내교통 상황에서 본사와 공장을 왕복하다보면 하루 일과가 끝나기
십상이다.

바쁘기는 얼마나 바쁜가.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되는 일은 없다.

꽃마을회의의 결론은 "우리 모두 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자"고 한다.

꽃마을에 참석했던 간부들은 귀가길에 생각할 것이다.

"이래 가지고는 안되는데..."

그래서 꽃마을에는 들어가는 안건은 많아도 나오는 결론이 없다.

꽃마을에만 들어가면 모두 나오지 않는 것이다.

회의가 시작될 때에는 단순해 보이던 토의사항도 회의가 끝날 때쯤이면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서로 좋은 분위기에서 시작된 회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굴을
붉히게된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실락원(lost paradise)이다.

필자가 경험한 꽃마을은 수없이 많다.

필자는 1년내내 꽃마을을 돌다 지쳐서 신제품 개발을 포기한 경우도
많았다.

꽃마을 회의 규범이 군작전 회의에서 채택된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아무리 기다려도 특공대 지원자가 없을 것이다.

작전담당지역을 서로 맡지 않으려고 미룰 것이다.

현재 주둔 지역을 떠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작전회의의 결론은 어떻게 날 것인가.

출전을 보류하며 필승을 다짐하는 군가를 힘차게 부르고 해산할
것이다.

지휘관도 작전회의 결과에 수긍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부대의 상급지휘관은 출전횟수는 따지지 않고 패전횟수만을
따져 처벌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같은 꽃마을 회의가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축구단에 열렸다면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까.

최종수비를 맡은 골키퍼는 수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그가 책임질 수
있는 수비와 책임질 수 없는 수비를 엄격히 구분하려 할 것이다.

최전방 공격수는 코너 킥을 할 때 그에게 공을 너무 자주 보내지
말아달라고 호소할 것이다.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미들라인 진영은 뛰어다니는 면적이 너무 넓으니 공격진과 수비진이
담당지역을 조금씩 더 넓혀 달라고 할 것이다.

왜 기업에서는 꽃마을 회의가 반복되고 있는데 대표팀에서는 꽃마을
회의가 있을 수 없는가.

기업에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빠져있고,
대표팀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회장은 돌봐야 될 계열회사가 많아서 회의에 일일이 참석을
못하고 있고, 축구팀 감독은 맡은 팀이 하나밖에 없어서 항상 회의를
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마이크로소프트, 제너럴일렉트릭, 인텔사에는 꽃마을 회의가 없을까.

빌 게이츠, 잭 월치, 앤디 그로브 회장은 무슨 시간이 그리도 많아서
회의마다 참석하는가.

주력하고 있는 회사 업무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 대기업 회장들은 세계 초일류기업의 회장들보다 더 바쁜가.

왜 꽃마을 회의는 끝없이 진행되는가.

잡화상이 되기 전에는 꽃마을이 없었다.

회의내용을 회장이 직접 챙겼고, 여러 사람을 불러 따로 의견을 물었고,
머뭇거리는 사람은 독려하였고, 그래도 안되면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하였다.

꽃마을은 최고경영자가 현장을 떠나 리모컨으로 경영을 지휘할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마을이다.

우리 대기업의 의사결정 관습을 비평한 외국학자는 우산살같다고
비유하였다.

시급한 의사결정이 우산살에서 즉시 처리되지 못하고 모든 우산살을 거친
후 중간에 있는 우산대까지 갔다와야 되기 때문이다.

외국 기자는 우리 기업을 보고 마치 자기가 쳐 놓은 거미줄에 갇힌
거미같다는 표현을 한 사람도 있다.

하도 복잡하게 거미줄을 쳐놓다 보니 거미가 갇혀버린 것이다.

갇힌 거미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잡화상의 직렬회로와 꽃마을의 폐단을 없애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직렬회로를 단축하고 꽃마을을 철거해야 한다.

외국의 일류기업들은 어떻게 꽃마을 회의를 진행하는가.

IBM은 의사결정 단계의 80%를 줄였고,참여 인원을 50%감축했다.

직렬회로가 짧아지고 꽃마을이 축소된 것이다.

크라이슬러사의 아이아코카 회장은 35명의 부사장을 2명으로 줄이고,
주요 안건은 회장이 직접 주재하는 11인 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부서간에 높은 장벽은 플랫폼(Platform)이라는 단일 개발팀을 만들어
이 팀에서 모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직렬회로와 꽃마을을 동시에 철거한 것이다.

아이아 코카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무조건 2시간내에 가부간 결정이
나야한다.

섬광이 번쩍이듯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시바의 최고 히트 상품인 노트북 컴퓨터를 개발한 ADI 그룹은 2주마다
신규사업을 선정해야 한다.

선정된 신규사업은 3개월마다 전사 임직원에게 발표해야 하고 그 자리에서
사업추진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

추진하라는 결론도 나고 기각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류되는 사안은 없다.

우리 기업은 먼저 새로운 회의록을 작성하여야 한다.

회의록에는 회의 내용을 쓸 필요가 없다.

다만 몇번 회의해서 몇 번이나 결론이 났는지, 결론난 것중에 "한번
추진해보자"고 결정한 횟수와 "문제가 많으니 포기하자"고 결정한 횟수만
적으면 된다.

그러나 보류한 내용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효과적인 대책은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직렬회로와 꽃마을 회의만 없어진다면 쾌속진군이 이루어질 것이다.

대표 축구단 감독이 작전회의를 직접 주재하듯이 기업의 경영전략 회의도
회장이 직접 주도하면 모든 것이 풀린다.

기마민족의 후예인 우리들은 목적이 뚜렸하고 목표만 확실하다면
노도같이, 질풍같이 전진할 것이다.

회장들이 직접 나서기만 한다면 우리 산업은 2~3년 이내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세계시장을 또다시 휘저어 놓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