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원(1426~56)은 자를 태초라 하고 호를 낭간이라 하니 안평대군 이용도
이 호를 함께 썼었다.

매죽헌을 성삼문과 함께 호로 쓴 것과 같은 예이다.

안평대군보다 8년 후배인데 호를 나누어 쓸 정도였다면 안평대군의 지우가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유성원의 집안은 고려 5백년동안 삼한 갑족의 지위를 계속 잃지 않았던 문화
유씨였다.

시조 유차달이 황해도 구월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으로 왕건 태조를
도와 고려의 개국에 협찬하였으므로 태조로부터 삼한익찬벽상2등공신에
봉해진 다음 그 후손들이 계속 중앙의 요직을 거치다가 6대손인 유공권
(1132~96)에 이르러서는 금자광록대부(종1품) 정당문학 참지정사 판예부사
의 대신의 지위에 오르는데 그는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명필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필적은 용인 광교산 서봉사 현오선사 탑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공권의 차자인 유택은 한림학사 대제학을 지낸 문사로 벼슬이 좌복야
(좌복사)에 이르렀고, 그 아들 유경(1211~89)은 최의를 죽여 최씨정권을
종식시킨 공으로 태자태보 참지정사 문하시랑 중서문하평장사 첨의시랑찬성사
등을 거치는 재상이 되었으며, 그 아들 유승(1248~98) 역시 지밀직사사와
도첨의참리를 지내는데 이 이는 당세 고려 제일 명문이라 할 수 있는 남양
홍 문의 병부상서 홍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
홍씨의 고모부가 된다.

유성원은 이 유승의 6대손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유승의 증손인 유만수가 태조 이성계를 쫓아 위화도에서
회군한 공로로 개국 1등공신이 되어 문하시랑 찬성사에 오르지만 1차
왕자난에 태종에게 참살되어 문화유씨가 조선왕조에서 갑족으로 부상하는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래서 유성원의 직계 조상들도 벼슬이 미관말직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증조부 유유는 나주목사에 그쳤고 조부 유허는 한성좌윤을 지냈을 뿐이다.

부친 유사근은 태종 원년(1401) 신사 증광시에서 동진사 23인중 1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사인(정4품)에 이르렀으나 일찍 돌아갔던
듯 하니, 단종 원년(1453) 5월 25일 실록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조에 이렇게 전지하였다.

"만약 창덕궁과 흥인문 수문 등의 역사를 끝마치거든 무릇 영선은 선공감
으로 하여금 그를 주관하게 하고 따로 사람을 뽑아 감역하게 하지 말라"

또 이조와 병조에 이렇게 전지하였다.

"수양대군이 연경에 갔을 때 따라갔던 사람과 "병요" "병서"의 수찬인및
조충손의 가자는 모두 되 거둬들이도록 하라"

유성원이 힘써 간함으로 인해서이다.

김종서가 이를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요사이 가자한 일에 우리들의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나 우리들이 대체 어찌 말하였겠나. 그러나 비답을 내리던 날도
임금의 명령이었는데 이제 이에 환수한다 하니 경솔한 듯 하다"

황보인은 깊이 유성원을 미워하여 춘추관에 앉아서 김종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 부친 유사근도 역시 발끈하기 잘 하며 스스로 어진체하다가 불행히
단명하여 죽더니 지금 이 사람도 그 부친을 닮으려 하는가"

비록 수양 일파가 김종서와 황보인에게 자신들의 허물을 덮어 씌우려는
의도로 남겨 놓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유성원의 부친 유사근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같은 성품의 소유자로 단명하였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종 원년(1864)에 간행된 "문화유씨세보" 권 3에서 유사근의 묘소가
충청북도 음성 원서면 자은 갈거리 부모동에 있다 하였으니 유성원의 고향은
충북 음성이었던 모양이다.

명종 20년(1565)에 출간된 "문화유씨세보" 권 1에 의하면 유사근은 4남
4녀중 셋째로 위로 누님과 형이 있고 아래로 세 누이와 두 동생이 있는데
바로 아래 여동생이 김종서의 형인 김종흥에게 출가해 있다.

이로 보면 황보인이 김종서에게 했다는 유사근에 대한 험담은 사실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김종서의 유일한 형인 김종흥의 손위 처남에 대한 험담을 이와 같이
김종서에게 할 수 있었겠는가.

수양 일파의 행위를 이들에게 무리하게 덮어씌우다 불합리하게 꾸며진 대목
중의 하나이다.

유성원으로 보면 김종서는 둘째 고모부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니 비록
사돈간이기는 하지만 결코 먼 사이가 아니었는데 어찌 김종서와 혐의질 일을
하였겠는가.

더구나 김종흥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그 장녀가 은진 송계사
에게 출가하여 위험을 무릅쓰면서 김종서의 후손들을 적극 보호하는 지극한
우애를 보이고 있었음에랴!

유성원에게는 이조참의를 지낸 이복형 유승순을 비롯하여 사직을 지낸
동복형 유효원과 충원 신원 경원 등 세 아우가 있었고 현감 홍계생에게
출가한 막내누이가 있었다.

유성원은 세종 26년(1444) 갑자 식년시에 병과 7인중 4등으로 문과에
급제하는데, 동방으로 급제한 이극감(1427~65)이 벼슬에서 항상 유성원의
뒤를 바짝 따르는 것을 보면 유성원이 한살 많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유성원은 세종8년(1426) 병오생으로 이때 19세였을 것이다.

유성원에 관한 기록은 "육신전"에서조차 매우 소략한데 "문화유씨세보"
에서도 그 처가가 어느 집안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런데 "성종실록" 권 75 8년(1477) 1월 8일 조에서 지중추부사 송처관
(1410~77)이 돌아간 사실을 밝히는 졸기에서 그 누이가 유성원의 아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 누이동생 송씨는 유성원이 죄를 입자 적몰되어 종이 된 다음 남에게
품도 팔고 빌어먹기도 하며 살았었는데 처관의 집은 부자로 넉넉하면서도
거두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송처관을 그르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로써 유성원의 처가 청주 송씨 송구의 따님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송처관의 처 밀양 박씨는 유성원의 막내 고모부인 정랑 박립기의
막내딸로 유성원의 내종4촌 누님이었으니 송처관과 유성원은 처남 남매간
이자 내외종4촌 남매간이기도 한 겹겹의 인척관계가 있었다.

오히려 이런 중복된 인척관계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유성원의 처를 모른척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송처관은 세종성시에 안평대군의 지우를 받아 "몽유도원도"에 제화시를
남기기도 한 그런 인물인데 세태가 돌변하자 안면을 몰수하고 만고충신의
부인인 제 누이동생까지도 구걸하다 죽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선비는 커녕
짐승만도 못한 인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사욕을 위해 의리와 명분을 초개와 같이 버린 송처관이었지만
유성원보다 고작 21년이란 세월을 더 살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후사 없이 죽고 말아 인색하게 모아두었던 재산조차 속절없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31세의 젊은 나이로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영원히 역사속에
존경받는 인물로 살아남은 그의 손아래 매부 유성원과 비교해 보면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송처관이 세종 29년(1447) 정묘 4월 23일에 그려진 "몽유도원도"에 붙인
제화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평생 성격이 기벽하여 그윽하고 맑은 것 좋아해서, 신선 사는 곳
찾아가서 한번 마음씻기 원했었으니.

진나라 현인들이 세상을 피해 사는 곳 상상도 하고, 진나라 현인들이 시내
따라 들어가던 것 그리기도 했었네.

옛날부터 지금까지 시를 지어 교묘한 아름다움 다투기도 하고, 수많은 그림
으로 신묘하고 정밀한 모습 그려내기도 했지.

문득 안거나 달리거나 그 기운 어거하기 어려운 것 한탄만 하니, 흡사
매달린 박통 이름난 것과 같았네.

하루아침에 문득 도원의 그림을 보니, 천년 뒤에 오히려 물위의 꽃다움
찾은 듯하다.

시내가 어부를 이끌어 아름다운 화초 만나게 함에, 꽃 속에 숨은 구름길
에서 자줏빛 노을이 인다.

산중에서는 봄인지 여름인지도 알지 못하거늘, 세상에서 어찌 한나라와
진나라가 바뀌는 것 알 수 있겠나.

세속의 보통 사람들은 이르지도 못하려니와, 고아한 사람이라도 맑은
꿈꾸기는 어려운 일.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 되었다는 것 한갓 헛된 말이니, 사령운이 못가의
봄풀 되었다는 말 어찌 평할 것인가.

마음이 스스로 티끌세상 벗어나지 못하였거늘, 정신이 어찌 신선세계에
들어가 노닐 수 있나.

아아!

공자께서는 실오라기 만한 찌꺼기도 끊으셔서, 영대(마음 정신)처럼
맑으니 홀로 밝은 데로 나아가셨구나.

오랫동안 도서를 가까이 했어도 얽매이지 않고, 매양 매죽과 함께 하며
널리 형상을 잊네.

세상밖 태허의 맑은 경지에 노니시니, 한번 자고 깨며 신선세계 꿰뚫어
보셨구나.

색다른 경계 비단 한 폭에 옮겨 놓으시고, 기이한 종적 붓을 종횡으로
휘둘러 써내셨구나.

그림 펼치니 마치 신선세계 들어온 것 같고, 기문 읽으니 벼슬살이 영화를
모두 잊겠다.

신령스런 삽살개 반겨 맞아 짖을 듯 하고, 그리움 가득한 신선들 묻고
서로 놀라는 듯.

나직이 읊조리는데 어느덧 도끼자루가 먼저 썩었고, 옮겨온지 얼마 안되어
해가 벌써 바뀌었구나.

가옥이 즐비하고 태평하니 지금의 화서나라요, 옷자락 끌며 다니는 여러
사람들 모두 장경성(금성, 문학을 맡고 있는 별)의 화신들이라.

스스로 많이들 세상에 살면서 금마문(한나라 장안 말앙궁에 있던 문.
문사들이 출사하던 곳. 본래 이름은 로반문이었으나 문밖에 동마상 한 쌍이
있어서 금마문의 이름을 얻다)에 의지하여, 티끌에 물들고도 신선된 줄 알고
있네.

아깝구나!

2,3인 시종의 대열에, 증점이나 팽조처럼 종유하지도 못하였구나"

그의 앞날을 내다볼 수 있을 만큼 아첨기 가득한 문장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