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사.하이터치 공동기획-

이면우 <서울대 교수>


산학협동 연구에 종사하면서 궁금한 것이 몇가지 있었다.

우리 제조업의 특징은 무엇인가.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하려면 어떻게 추진해야할
것인가?

10여년전부터 이 문제에 골몰하다가 드디어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제조업은 단봉낙타이다.

제조업은 대략 10단계의 업무를 거쳐 진행된다.

즉 기술정보 상품기획 연구개발 설계 설비계획 부품조달 생산 판매기획
판매 사후관리(After Service)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 제조업은 상품기획과 연구개발은 해외기술의 도입에
의존하였고, 판매및 사후관리단계는 외국 바이어들에게 기대어 왔다.

우리 손으로 직접 담당하였던 것은 생산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생산기술은 낙타 등의 가장 높은 중앙
부분이고, 전반부의 기술정보-상품기획-연구개발과 후반부의 판매기획-
판매-사후관리는 낙타의 양쪽 끝과 같이 아직도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제조업이 살아 남을수 있는 최단기 응급처방은 무엇인가?

첫째, 취약한 상품기획 기능은 상품기획 전문가 단기양성 계획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집중적인 교육훈련과 일선 상품기획 업무를 병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미래지향적 상품기획 조직이 즉시 운용되어야 한다.

둘째, 허망한 첨단기술을 구가하면서 실제로는 모방에 심취했던 역개발
(Reverse engineering)연구를 중단하고 상품기획과 연계된 연구개발을
착수하여야 한다.

상품기획 기능의 발전은 우리가 가장 취약했던 "연구의 필요성"을 남보다
먼저 파악하는 기능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연구의 필요성만 먼저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창의적 발상에 주력하고
해외 첨단기술의 조합, 해외전문가 활용을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연구개발
체제를 확립하므로서 연구개발 주도국가로 단기간내에 도약할수 있다.

셋째, 독자적 상품기획과 창의적 연구개발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확보되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생산기술과 양산설비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형 엔진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건축물 폐자재를 부수는 망치와 금광에서 금맥을 찾아내는
망치는 같은 망치라 할지라도 그 가치는 천지차이가 날 것이다.

이와같은 전략을 시급히 추진한다면 우리 제조업은 위기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시일내에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수 있다.

왜 이런 처방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할 것이다.

이제 기술정보, 상품기획과 연구개발 측면을 중심으로 우리 제조업의
현주소를 파악하여보자.

기술동향 파악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곤충의 더듬이에 해당된다.

더듬이가 없는 곤충은 어떻게 되는가?

스스로 먹이를 찾을수 없으니 죽을수 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에 국내 2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의 기술정보수집을 위한 시스템 구비는 약 50% 수준이고 기술정보의
활용수준은 약 30%인 것으로 나타났다.

더듬이가 작동될 확률이 30% 정도인 곤충인 셈이다.

적기의 출현을 알려주는 레이더의 작동비율이 약 30%이면서 창공을 지켜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 기업들은 해외전시를 상품정보 파악의 가장 중요한 기회로 삼는다.

그러나 전시회에서 나온 제품은 이미 기술정보 상품기획 연구개발 설계
설비계획이 대충 끝났을 것이며, 부품 조달도 상당한 수준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니 전시회에 가서 처음 본 신제 품은 10단계중에서 이미 6단계가
지난 후에야 뒤늦게 우리에게 전시되는 것이다.

1백m 경주에 비유하자면 잘 뛰는 선수가 이미 60m쯤 뛴 다음에 뒤늦게
출발선에서 서두르는 것과 같다.

남의 것을 본 후에 신제품을 개발하자니 독자적인 연구개발이나 자체적인
설계보다는 선발기업에서 기술과 공정을 도입하려 할 것이다.

시장에 빨리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진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잘 팔릴 것같은 물건은 이전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시장에서 한물간 구형모델은 연구개발비와 금형제작 비용까지
포함된 높은 가격으로 사갈 것을 요구할 것이다.

물건이 팔리는 대로 로열티도 지불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경쟁에 지도록 결정된 셈이다.

우리 산업은 이제까지 본격적으로 상품기획을 해본 적이 없다.

선진 기업에서 만든 제품을 도입하고 모방설계를 하였으며, 세계시장에서
소비자 구매욕이 입증된 상품만을 뒤늦게 착수하였다.

그러니 독자적인 상품기획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셈 아닌가?

필자는 산학협동으로 하이터치 연구를 추진하면서 아직까지 없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자 하는 노력을 추진하여 왔다.

1989년에 만든 입체형 컴퓨터 키보드는 손목의 피로를 근본적으로
덜어주는 최첨단 제품이다.

1993년에 출시되어 1조원 이상 팔린 맥킨토시 키보드보다 4년 앞선
상품기획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런 제품을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부결되었다.

"정말로 그렇게 좋은 키보드라면 왜 IBM에서 아직까지 개발하지
않았겠는가"

남이 만든 것을 모방만 해왔기 때문에 남이 안한 것은 만들면 큰일나는
줄 알고 있는 것이다.

조선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조정의 명을 어기고 회군을
하는 이유로 사불가(사불가)이론을 내세웠다.

필자는 산학협동을 추진하며 삼불가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신제품 개발을 위한 상품기획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기업의 관리자들은 세가지 문제점을 이유로 들어 개발을 기피함을 말한다.

첫번째 반대 이유는 가격상승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능을 붙이면 제품원가가 올라가고 판매가도 높아질 것이다.

가격경쟁력이 떨어질테니 신제품을 만들어도 많이 팔리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항의는 양산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직육면체로 만든제품의 모서리를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게 곡면으로
처리하자고 하면 벌떼같이 반대하였다.

현재 직육면체 제품으로도 공정생산성이 낮아서 고민인데 이를 곡면으로
바꾸면 생산성이 더욱 저하될 것이라고 하였다.

세번째 문제는 무엇인가?

신뢰성을 보장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면 부품이 늘어나고 따라서 고장날 확률도 늘어날
것이다.

현재 생산되고 있는 제품도 고장율이 높아서 걱정인데 부품수가
늘어나면 고장이 더욱 잦아질 것 아닌가?

그러므로 신뢰성에 문제가 있으니 그만 두자고 하였다.

그렇다면 삼불가 이론이 가리키는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제품은 마르고 닳도록 새로운 기능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모양을 예쁘게 만들 수도 없다.

신기능도 포기하여야 한다.

삼불가 이론을 두고 격론을 벌인 후 필자는 경영진에게 제안하였다.

"삼불가 이론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우리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삼불가 이론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자"

임원들이 되물었다.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겠는가?"

필자는 대답하였다.

"아예 제품을 만들지 말고 회사문을 닫아라"

필자는 정부의 국책연구소와 대기업의 종합연구소를 방문하면서 국내
연구소의 고민을 알게 되었다.

우리 연구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첫째, 수만평의 대지 위에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둘째, 수천평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다.

세째, 수백명의 연구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 날을 택하여 연구소 개소식을 거행한다.

성공을 기원하며 성대한 출범식을 갖는 것이다.

모든 것이 구비된 이 연구소에 오직 한가지가 빠져있다.

연구소의 명명백백한 연구목표가 없다.

연구목표가 없으니 수백명의 연구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선발기준을 따랐을 것이다.

해당분야를 전공한 자, 학벌이 석사 이상인 자, 해외유학 경험이 있는
자 등이 선발대상이었을 것이다.

연구소가 출범하면 정부의 고위층, 혹은 기업의 회장이 격려차 연구소를
방문할 것이다.

연구소 소장들은 긴장할 것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급한 김에 이들은 결론을 낼 것이다.

우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자.

열심히 일하자니 무언가 바쁘게 보여야 할 것이고, 바쁜 일을 하다보니
본연의 연구와는 관계없는 쓸데없는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연구소 소장은 연구원들에게 지시할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연구대상을 적어 내라고, 수백명의 연구원들은 제각각
본인들이 제일 잘 아는 내용을 강조할 것이다.

연구소의 간부들은 모든 분야에 연구비를 지급할 것이다.

고급인력을 뽑아놓고 놀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수백명의 연구원이 동시에, 전분야에 걸쳐, 다발적, 평형적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연구소를 난지도 연구소라고 부른다.

필자가 방문한 선진국의 명문 연구소는 우리와는 판이한 과정을 거쳐
성장하였다.

연구과제를 선정하기 전에는 한명의 연구원도 뽑지 않았다.

한명의 연구원을 뽑으면 그 연구원이 다음 과정의 연구에 필요한 연구원을
찾아 사방을 수소문하였다.

즉, 성공하는 연구소의 특징은 작게 시작하고, 건물도 없고, 연구원을
공모하지도 않는다.

특히 연구소 개소식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연구목표도 미쳐 찾지 못한채 벌판에 우람한 건물을 짓고, 수백명이
모여 원근 각처에서 내빈을 초청하여 한날 한시에 출범을 축하하는 연구소는
거의 틀림없는 난지도 연구소가 될 것이다.

결국 단봉낙타 이론이 제시하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방안은 무엇보다 동향을
파악하는 곤충의 더듬이 기능을 시급히 확보하여 독자적인 상품을 개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동향과 시장추세에 통달하여야 되며, 소비자 기호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므로써 소비자를 선도하고 시장을 창출하는 상품기획 능력이
우수하여야 한다.

상품기획은 제조업의 성패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또한, 우리 연구소는 이제까지의 남의 것을 보고 그대로 베끼는 역개발
연구를 포기하고 창의적인 연구개발을 시도해야 한다.

창의적인 발상만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면 요소요소에 필요한 첨단기술은
전세계 연구소를 대상으로 얼마든지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첨단기술이 비싼 것으로 여겨왔으나 사실은 첨단기술은
매우 싸다는 점을 새로이 인식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왜 비싼 기술료를 지불하였는가? 남이 만들 제품기술을
통채로(System Package) 사왔으니까 비싼 것이지 요소기술을 따로 사면
매우 싸다.

마치 같은 음식이라도 고급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값은 비싸고, 시장을 봐서
집에서 해먹는 음식값은 싼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생산기술은 우리나라 제조업 부문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부문이다.

여기에 창의적인 연구개발과 독자적인 상품기획 능력만 가미된다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양산설비는 우리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고부가
신제품을 공급하느라 밤을 새워야 할 것이다.

결국 제조업의 살 길은 무엇인가?

포기하여야 산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