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사.하이터치 공동기획-


이면우 <서울대 교수>

사방이 옥수수밭으로 둘러싸여 있는 미국 아이오와 주에는 독일후예들끼리
모여 살면서 옛날 독일지방 스타일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아마나(Amana)라는
관광 마을이 있다.

모든 것이 고풍스러운 이곳 시골 마을에서 뜻밖에도 아마나라는 상표를
붙인 고급가전 제품이 만들어져 전세계에 공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공단을 이루며 큰 공장과 높은 사무실로 위용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은 이 시골마을의 협동조합만도 못하지 않은가.

우리 재벌 기업들이야말로 화전민 마을의 잡화상 아닌가.

아마나 상표는 냉장고 오븐 세탁기 등에서 최고 가격과 최고 수익성만을
고집하고 있다.

마을 협동조합이 주축이 되어 첨단기술개발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소에
맡기고, 디자인은 세계적인 대가에게 의뢰하며, 각종 부품도 유명한
부품회사에서 만들어 공급한다.

그럼 아마나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세계 최고급
제품을 만들겠다는 생각과 농한기를 틈타 온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내 물건을
만들듯이 정성을 쏟아 꼼꼼히 조립하는 협동정신을 고집한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 숫자도 한정되어 있고 일할 수 있는 기간도 일정하므로 많이
만들 수는 없어서 항상 주문이 밀려 있다고 하였다.

답답한 생각이 들어서 공장을 증설하지 그러느냐고 되물었더니 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되면 협동심이 부족한 외부사람들이 많아져 불필요한
관리 인원이 늘어나고 제품 품질도 문제가 되어 결국 현재보다 이익이
줄어들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시골에 있는 마을조합에 가서 창피를 당한 셈이다.

이 마을 방문은 필자에게 여러가지 면에서 큰 충격이었다.

회사도 없고 공장도 없는 시골마을에서 최고급 가전제품을 만들어 전세계에
공급한다.

주문량이 밀려 있으니 마케팅 비용도 필요없고, 접대비도 없고, 항상
물건이 모자라니 창고도 필요없고, 재고관리 전산프로그램도 없다.

생산 품목도 일정하다.

남들이 무엇을 만들든 상관하지 않고 늘 만들던 물건만을 항상 최고의
품질로 만들어 높은 가격을 받는다.

옥수수밭을 태워 농사 짓는 미국 화전민 마을은 한가지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여유있게 상대한다.

우리 화전민 마을에는 유명한 잡화상들이 많다.

이 잡화상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자존심 때문에 경쟁도 치열하다.

마을에서 대접받으려면 잡화상의 크기가 가장 중요하다.

큰 잡화상이 아니면 마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

화전민 신문마다 매년 마을의 많은 잡화상 명단을 공개한다.

좁은 화전민 마을에서 여러 잡화상들이 벌이는 경쟁은 필사적이다.

이웃 마을에는 져도 좋으나 같은 마을의 옆집 잡화상에는 절대로 질 수
없다고 다짐한다.

수입을 할 때는 다투어 비싼 값을 제시하고 수출을 할 때는 마을
잡화상끼리 가격경쟁이 붙는다.

정부는 큰 잡화상을 중심으로 정책을 수립한다.

큰 잡화상이 망하게 되면 작은 잡화상이 망한 것보다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잡화상이 클수록 실직하는 사람수가 늘어날 것이니 망하는 것을 보고
방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큰 잡화상이 살아나면 빚을 갚을 것인가.

자금여유가 생기면 빚을 갚기보다는 또 다른 잡화를 취급할 것 아닌가.

화전민마을이 개방되면 마을의 잡화상은 흔들릴 것이다.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잡화상들을 외국기업이 헐값으로 인수할
것이다.

잡화상 주인 중에는 한가지 잡화에 몰두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집중하려고 했더니 면장 이장이 화를 내는 것이다.

같이 밥을 먹자고도 안하고, 화전민일보 인물동정란에도 기사가 나지
않으며, 서당을 마친 학생들도 무조건 큰 잡화상만으로 몰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도 결국 포기하고 크기를 경쟁하는 시류를 따랐을 것이다.

마음속의 가훈은 무엇인가.

일단 커야 이야기가 된다.

크면 대접받는다.

크면 더 커질 수 있다.

바둑 동호인이 많은 회사는 정상의 프로 바둑기사를 초청하여 회사에서
선발된 아마추어 바둑 동호인 30~40명과 한꺼번에 대국하는 행사를 벌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프로9단 격인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하는 세계 각국의 군소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30~40명의 바둑 동호인과 같다.

한명의 프로기사가 30~40명의 아마추어 기사를 상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화전민 마을의 잡화상은 각 아마추어 바둑기사가 전세계
30~40명의 프로 바둑기사와 한꺼번에 대결하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을 걸고 하는 무한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대략 화전민 마을 아마추어 기사의 전적이 짐작되지 않는가.

미국에도 잡화상은 많다.

디즈니(Disney)라는 잡화상도 사업다각화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핵심역량을 중심으로 인접분야만을 선별적으로 확장한다.

이렇게 확장을 계속한 디즈니사는 잡화상인데도 취급하는 잡화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잡화상도 알고 보면 천차만별인 것이다.

우리마을 회장들도 한 계열, 한 회사, 한 제품에만 모든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지가 많은 나무이다보니 바람 잘 날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화전민 마을에는 구호가 많다.

모두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겠다고 한다.

그러나 자존심이 있어서 구호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세계 초우수 기업, 초일류 기업, 초우량 기업 등이 자주 쓰이고 세계에서
단 하나의 기업이 되겠다는 당찬 구호도 보았다.

화전민 마을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마을 서당도 덩달아 구호를 붙인다.

한 서당에서 세계 10위권 대학에 진입하겠다고 했더니 그 옆의 서당은
겁도 없이 세계 5위권 대학이 되겠다고 하였다.

필자가 소속한 서당은 세계 8백위라고 들었다.

구호가 많이 붙은 것을 보면 착잡한 생각이 든다.

빈 깡통이 소리가 크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린다는 말도 있다.

겁이 많은 개가 자주 짖는다.

싸움을 잘하는 개는 소리없이 물지 않는가.

해외에서 보는 우리 재벌의 특징은 무엇인가.

회장이 결정을 내리면 밑에 있는 사람들은 좀처럼 거역을 못한다.

금융차입은 정부가 보장하고, 내수시장도 국가가 보호한다.

국민들은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캠페인에 적극 참여한다.

서구의 기업인이 보면 가히 환상적인 기업여건이다.

누구라도 이런 여건하에서는 재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부지원과 내수시장 보호막 속에서 지내다 보니 과잉보호 현상이
나타났고, 공정한 경쟁에는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땅 짚고 헤어치기를 즐겼고 위험부담을 극력 회피하였다.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만 타고 다닌 격이며, 심판이 적극 편들어 주는
경기에만 출전한 꼴이 되었다.

불확실한 것은 회피하였고 신규사업진출 시에는 사전에 이미 판매가
보장된 자사보유시장에 집착하였다.

자사보유시장이란 무엇인가.

매출이 보장된 시장, 즉 사원 가족 협력사 가족이 어쩔 수 없이 관계사
제품을 사는 시장을 칭한다.

수출입 물량이 많으면 무역회사를 차리고, 공장을 짓게 되면 건설회사를
만들고, 본사 사옥관리를 위해 용역회사를 세우고, 전산작업이 많아지면
소프트웨어 회사를 만들고, 직원들의 해외출장이 잦아지면 여행사를 차리고,
광고지출이 많아지면 광고회사를 세운다.

결제하는 액수가 많아지면 신용카드회사를 세우고, 접대할 일이 많아지면
음식점을 내고, 체류하는 방문객이 많아지면 호텔을 세운다.

회장의 취미가 신규사업대상이 되고, 이웃집 잡화상이 새로 판매하는
물건이 있으면 우리도 팔아야 직성이 풀린다.

선진국 기술을 가져다 모방하는 회사는 아무리 규모가 커도 2류회사이다.

그 2류회사 밑에 많은 부품회사 협력회사가 있다.

2류회사의 지시를 받고 부품을 만드는 계열회사, 이곳에 납품하는
협력회사는 아무리 잘되어도 3류회사일 것이다.

현재 2류쯤 되는 계열사도 종가집 지시를 따르다보면 결국 3류회사로
전락할 것이다.

이제 IMF시대에 잡화상의 고민은 무엇인가.

잡화상 계열사중 돈을 버는 곳은 평균적으로 5분의1정도이다.

5분의1이 돈을 벌어서 나머지 5분의4를 도와준다.

사업다각화가 도를 지나친 것이다.

돈 버는 회사에 있는 사원들은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벌면 뭐하냐. 저것들이 다 갖다 쓰는데"

돈을 못버는 회사의 사원들은 뻔뻔하다.

"아껴 쓰면 뭐하나" "돈 벌면 뭐하나"하는 생각도 들것이다.

모두들 사업규모를 줄이고 계열사를 정리해야 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얼마나 포기해야할지 통 감이 안잡힌다.

먼저 계열사별로 예상수익보다 소요비용이 높은 사업장은 어디인가 보면
되지 않은가.

가까운 시일내에 돈을 벌 승산이 있느냐.

밑 빠진 독, 금간 독에는 절대로 물을 붓지 않겠다.

경영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잭 웰치 같았으면 최소한 소요비용이 높은
계열사 80%는 보지도 않고 정리했을 것이다.

이제 화전민 마을의 시장이 개방되면 바깥 마을 사람들이 온갖 잡화를
들여올 것이다.

각종 금융혜택과 차관 보증도 힘들어질 것이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 도와줄수 없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이제 화전민 마을의 많은 잡화상들은 협력과 공존을 위한 잡화상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대기업은 경쟁은 치열하게 하지만 게임의 법칙이 있다.

관련산업의 대기업들이 지존심을 자제하면서 구성한 조합이 있다.

조합에서는 서로의 이익을 해치는 과당경쟁을 하지 못하도록 조정한다.

일본과 기술협약을 하려는 우리 기업이 일본 대기업들끼리 경쟁을 시켜
가격을 깎으려 해도 도무지 경쟁에 응하지 않는다.

크기 경쟁을 포기한 화전민 마을 잡화상은 이제 무엇을 대상으로 새로이
경쟁을 벌일 것인가.

우리 마을내에서 병적인 경쟁심과 독점권을 포기하고 다른 마을에 많이
팔 생각에 몰두해야 한다.

창의적 노력을 많이 하는 잡화상 명단을 만들고 중요한 일이 있을때마다
대통령이 오찬에 이들만 초대하여야 한다.

매출규모가 큰 잡화상 주인들은 섭섭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창의적 노력을 시작할 것이다.

부가가치가 높은 기업, 제품 이미지가 좋은 기업, 국제화가 잘된 기업,
미래지향적 기업의 순위로 기업평가서를 새로이 만들어 발표하여야 한다.

기업의 크기만 평가하다보니 모두 커지기만 하지 않았는가.

일부 잡화상 주인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 방식대로 운영하겠다며
여전히 고집을 부릴 것이다.

일부는 이꼴저꼴 보기 싫다고 후선으로 물러설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의 잡화상들은 결정을 보류하며 우왕좌왕할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변신에 노력한 일부 잡화상은 살아남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