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시작된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채 새해를 맞은
한국경제는 앞으로의 역경을 예측하며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우선 당면한 금융개혁이 매듭지어지면 은행권의 대출관행에 큰 변화가
있게 될 것이며, 새로운 대출환경과 고금리하에서 한계기업의 도산이 속출
하게 될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실업증가를 가져올 것이며, 이로 인한 근로자들의
상실감과 사회의 혼란이 앞으로 한국경제가 거쳐야 할 가장 큰 고통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은 정리해고제의 시행여부이다.

정리해고제의 신속한 도입을 주장하는 재계와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노동계측의 반발로 인하여 정리해고제는 현재 "뜨거운 감자"가 되어있는
실정이며, 정치권 역시 이의 적극적인 처리를 회피하여 지난해말 열린 국회
재경위에서는 각종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유독 정리해고제의 통과만은
환경노동위로 그 책임을 전가시켰다.

그러나 평생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근로자들의 불안감과 실업증가의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정치권의 속성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정리해고제 도입은 앞으로의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위해서 시행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임금삭감과 신규채용 감소 등을 통하여 실업의 증가없이 구조
조정을 단행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상 미봉책에
불과하다.

우선 신규채용을 줄임으로써 기존의 일자리를 보존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기존 근로자들의 기득권을 보호키 위하여 학업을 마치고 새로이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젊고 잠재적인 근로자들을 차별하는 조치가 될 것이다.

이는 실업률을 낮추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노동시장의 경직성
만을 더해주는 조치가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임금수준은 노동의 한계생산성과 일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
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동생산성과 무관하게 전사원을 대상으로 획일적인 임금삭감을
시행하는 것은 오히려 근로의욕을 저하시키는 조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근로자들이 받는 임금만이 인건비의 전부는 아니다.

인건비에는 임금과 같은 직접비용과 함께 교육과 훈련, 그리고 근로자들의
후생증진을 위한 각종의 간접비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삭감을 통해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실효성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이다.

비록 신규채용 축소와 임금삭감 등의 조치가 앞에서 열거한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으나, 만일 이러한 조치에 의하여 현재 맞고 있는 난관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정리해고제의 도입없이 이러한 미봉책들에 의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상황은 이러한 단기적인 미봉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선 한계기업들의 도산은 불가피할 것이며, 과거와는 달리 이와같은
도산의 위험은 금융기관을 포함한 대기업들에도 닥치게 되어 이로 인한
대규모 실업의 증가는 불가피할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준비하여야 하는 것은 실업의 방지책이 아니라 대량실업
이후 어떻게 하면 재취업의 기회를 넓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바로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정리해고제의 도입은 오히려 재취업의 기회를
넓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취업문도 좁지만 일단 취업을 하게
되면 자신의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삼게 되어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해고의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어 있었다.

높은 경제성장률 아래 확장일변도의 경영을 해오던 과거의 경우는 이러한
고용관행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일부 분야에서는 인력난
이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여 실업자가 1백만명을 넘게 된다면
이같은 과거의 관행은 오히려 재취업의 기회를 좁히는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즉 고용주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와 같은 경기침체하에서는 자유로운
해고권이 주어지지 않는 신규채용을 극도로 자제하게 될 것이며, 이는 곧
실직근로자들의 재취업을 제약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 예상되는 외국자본의 국내진출시 정리해고제의 도입은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만일 정리해고제의 미도입으로 인하여 충분한 외국자본의 국내진출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이는 곧 기존의 몇몇 일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외국
자본에 의하여 창출될 수 있는 수많은 신규 일자리를 포기하는 우를 범하는
격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경제난은 몇몇 미봉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대규모실업의 고통은 불가피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관심이 당장 눈앞에 닥친 실업의 방지가 아닌 차후 재취업과
신규 일자리의 창출에 있다면, 이를 촉진시킬 수 있는 조치로서 정리해고제의
도입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