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신문사 양봉진 부국장 현지르포 ]

새해가 밝았다.

희망과 소망으로 시작돼야 할 무인년이지만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모두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이
아직까지 역력하다.

그러나 세상만사 고저장단이 있게 마련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얘기야 말로 맞는 말이다.

더욱이 우리만 IMF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멕시코가 그렇고,멀게는 영국 또한 1976년 IMF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영국인들이 1976년 IMF처방에 따라 "쓰디 쓴 약"을 마신 것처럼 한국도
의사(IMF)의 처방을 받고 이에 따르기로 한만큼 약속대로 약(조건)을 처방
대로 잘 복용(이행)해야 하며 그렇게 하면 건강을 회복하고 현재 처한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다"

영국인들의 경험담을 들려주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스티븐 브라운
주한 영국대사의 고언이다.

그의 말대로 병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환자가 스스로 환자라는 것을
시인하고 의사를 믿고 따르는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도 "(개혁은) 남이 하라고 해서 할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협상론을 제기했던 김당선자에 대한 국내외의 의구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발언임에 틀림없다.

김당선자의 한 측근은 "개혁의 고통은 크지만 그 열매는 달다"고까지
말했다.

신정부의 개혁의지와 그 강도를 천명하려는 몸부림에서 나온 의도적 발언
이다.

이에 고무된 외국인들도 등돌렸던 길을 되돌아와 우리들의 개혁 프로그램을
관심있게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외환위기탈출의 관건이 되는 만기연장(roll-over)에도 적극적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뒤주에 곡식이 다시 쌓일 것 같다는 신뢰만 생기면 외국돈은 다시
돌아올수 있다.

그것이 자본주의(capitalism)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공은 우리쪽으로 넘어와 있는 것이다.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얘기는 수없이 들어왔다.

이제 문제는 실천이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

실천 주체는 최고통치권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개혁의 성패는 그의 실천의지와 결단력에 달려 있다.

김영삼정부가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한데 있다.

악역의 역설적 행복감(?)을 너무 모른데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개혁의 첫 단추는 정치권의 개혁부터 시작돼야 한다.

공무원수를 반이상 줄이라는 얘기를 하기 전에 국회의원 수를 반이상
줄여야 한다.

"작은 정부" 이전에 "작은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그동안 너무 컸던 것이 사실이다.

제 손가락부터 자르는 용단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따를 것이고 개혁도 쉬워진다.

"정치는 정치가 보이지 않을때 가장 좋은 정치"라는 얘기야 말로 맞는
얘기다.

공무원축소, 해고허용, 중복투자분 정리 등은 그후의 일이다.

개혁을 위해서라면 차기정부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선거중에 내놓은 공약은 완전히 잊어버릴 수밖에 없으며, 그동안 주변에서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배반하지 않을수 없고, 따라서 욕먹는 대통령이 될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을 진솔하게 설명해야 한다.

"저성장속 실업해소"는 "두 마리토끼잡기"와 같다.

이런 모순에 찬 경제논리와 정치적 구호는 이제 버려야 할때다.

무거운 짐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다가는 모두가 침몰, 공멸할수 밖에 없다.

"총론 찬성 각론 반대"식 이기주의를 버리자.

이제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인 용어의 사슬에서 벗어나자.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자.

민주를 부르짖으면서 다수결원칙을 무시하는 태도는 어불성실이다.

이런 정치행태야말로 민주주의의 걸림돌이다.

정치를 반으로 줄임과 동시에 정부를 반으로 줄이자.

그에따른 후유증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원성이 듣기 싫어 사람 잘라내기를 소홀히 한 것은 현정부의 가장 큰
실정중의 실정이었다.

차기 정부는 이미 청와대를 반으로 줄어기로 했다.

개혁은 이미 시작됐다.

문제는 이를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하이예크의 지적대로 중앙의 엘리트들이면 무엇이든 할수 있다는 "치명적
오만"(Fatal Conceit)은 금물이다.

규제개혁이 안됐던 것은 이런 오만에 현혹됐기 때문이다.

또다시 그런 과오를 범하며 과거의 틀 속에서 안주하려들면 "노예에의 길"
(Road to Serfdom)로 들어 설수 밖에 없다.

마음을 굳게 먹고 김당선자의 말대로 시장경제의 "자유로운 선택"(Free to
Choose)을 보장해 다시 한번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의 시대작 소명이다.

기업들이 다운사이징(down-sizing)을 하자면 해고와 실업이라는 우리에겐
오랫동안 낯설었던 용어를 떠 올려야 한다.

당하는 가정에선 "아닌 대낮에 웬 날벼락이냐"고 할것이 뻔하다.

그러나 정리해고와 이에따른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는 선진경제로 가기 위한
최소 필요조건이다.

"짐되는 기업"과 부실금융기관 정리 또한 결국은 "피를 보자"는 얘기다.

무서운 얘기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을 중시한다 하더라도 "뜨거운 가슴"만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해낼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가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차기 정부야 말로 "행복한 정부"가 될수 있다는 역설 또한 성립한다.

김당선자는 소외계층을 대변해 왔다고 자부해 왔기 때문이다.

IMF라는 호랑이 아닌 호랑이도 어떤 의미에선 힘을 실어 주고 있다.

보기에 따라선 개혁을 서두를수 있는 좋은(?) 여건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영국의 경험을 좋은 교훈으로 삼아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 이를
과감히 실천할 것인가의 선택은 김대중당선자와 차기 정부의 몫이다.

영국 대처(Thatcher) 총리로 부터 시작된 개혁의 기치와 씨앍을 이 땅에도
세우고 뿌려보자.

용기와 소신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한알의 밀알"이 되어 썩기를 마다하지
않고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식으로 개혁추진을 다짐하고 서둘러
이행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