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수는 자기방으로 오자마자 벌벌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 버튼을
두드린다.

"어매, 회장님께서 으짠 일로 이 밤중에 전화를 다 주시고, 웬 일 이당가?"

옥을 굴리는 듯한 미화의 음성에 그만 입이 헤벌어진다.

"밤중에 어딜 쏘다니는고?"

그는 근엄하게 꾸짖듯 묻는다.

"아이고매, 큰 일 나겄어라. 시골 엄니가 밤차로 오셔서 서울역에
마중갔다 왔구먼요. 글씨 제가 좋아하는 고들빼기 김치를 담가오셨지
뭐에유. 회장님도 고들빼기 김치가 좋다고 하셨지예?"

김치수는 싱글벙글하면서,

"장모님께 편히 주무시라고 전하고, 세계일주 티켓을 시드릴테니 눈 딱
감고 다녀오시라고 해라. 잘 자거라. 귀여운 것"

한편 권옥경은 몸이 근질근질해오자 삐삐와 핸드폰으로 연상 토요일의
애인 백영치를 불러댄다.

그러나 영 응답이 없다.

영치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게 틀림없다.

영치를 상대한 물개 박사장, 망나니 권옥경 여사, 제과회사의 미망인
백사장은 자신들은 모르고 있지만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채 또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고 있었다.

영치만이 우연히 에이즈검사를 받아본 결과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고
보따리를 싸 깊은 산속의 절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돈주고 사는 놈도 오늘은 전파에 안 잡히는군. 빌어먹을, 장미섬에
남자씨가 말랐나?"

술에 취한 권옥경이 심통을 부린다.

"아니, 권여사. 뭐가 마음대로 안 되는가?"

"나 요새 철학자 다 되어가네. 그 플레이보이들이 왜 치마만 걸쳤다 하면
여자로 보는지 그 이유를 알겠구먼. 이제부터 서너명을 복수로 사귀어야겠어.

그래야 하나가 사라져도 그 다음 대타와 놀고, 또 사라져도 대타가 남지.
지가 뭐 춘향이라고 하나만 정해놓고 놀아. 안 그래? 자꾸 갈아보는 것도
일가견이 있는 짓이야. 어떤 놈이든 처음에는 다 신선할 거 앙이가?

인자부터 바지만 걸쳤다 하면 지퍼 내려볼거구먼. 히히히"

"아이구, 그런 개똥철학을 인제사 득도했다는 거야? 너무 느리시네 아우님.
나는 언제부터 더블로 노는데. 따따블로 사귄다구"

그녀들이 증기탕으로 사라지는 그 시간에 지영웅은 미국 페블비치 세계
골프선수권대회에 참석하려고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영신이 왜 흐느끼는 지도 모르는채 키스를 퍼붓고 안녕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 헤어진 이후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동안 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 했고 죽는 순간까지 서로 가슴으로 사랑했다.

영혼으로만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나무관세음보살!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