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감하면서 되돌아보면 어느해치고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있을까마는 지난 정축년은 국민 모두가 견디기 힘든 충격과 허탈감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한해였다.

한마디로 "무너진 한해" "잊고싶은 한해"였다고나 할까.

어처구니 없이 붕괴되는 거품경제의 허상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허망감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만큼 깊은 것이었다.

21세기 세계경제를 주도한다는 부푼 꿈을 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지 채 1년도 못돼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자금을 지원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IMF구제금융을 계기로 국민들은 어처구니없는 현 정권의 실체를 보게
되었고, 이같은 국민적 분노는 결국 연말 대통령선거에서 건국이후 50년만에
최초로 야당이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뤄낸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국가부도를 눈앞에 두고도 "우리경제는 펀더멘털이 좋아 문제없다"고
잠꼬대같은 소리만 되풀이해온 무능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대기업그룹의 연쇄부도는 IMF사태와 서로 물고
물리는 인과관계를 형성하면서 1년내내 우리경제를 불안에 떨게 했다.

연초 한보그룹의 도산을 시작으로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해태 한라그룹
등이 줄줄이 쓰러졌으며, 기아그룹의 부도사태는 IMF사태를 불러온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지금까지 공신력의 대명사였던 금융기관 부도사태는 나라 전체의
금융메커니즘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그 충격이 컸다.

주가폭락과 예금인출사태로 고려증권과 동서증권이 부도를 냈으며, IMF와의
협약에 따라 금융개혁이 시작되면서 14개의 종합금융회사들이 업무정지명령을
받았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몰락은 수많은 중소기업의 도산을 촉발하는 등
업종과 규모를 가리지 않는 부도사태가 꼬리를 물었다.

기업도산은 필연적으로 실업자를 양산, 11월말 현재 실업자가 57만명에
달했으며 특히 11월 한달사이에 무려 12만명이 늘어나 내년의 실업대란을
예고해주고 있다.

본격적으로 정리해고제가 실시되면 내년의 실업자수는 1백5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사회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특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뒤 연말까지의 한달여는 금융공황의 공포와
혼돈속에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자금지원이 늦어지면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환율은 한때 2천원까지
치솟기도 했으며 시중실세금리는 연 30%대를 맴돌기도 했다.

증권시장은 종합주가지수 400선이 무너지고 주가가 10년전 수준으로
뒷걸음질치는 등 유례없는 폭락의 시련을 겪었다.

꼬리를 물고 터진 각종 구조적 비리사건들 중에서도 한보그룹에 얽힌
뇌물수수사건은 우리사회에 고질적인 정경유착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다시한번 실감케 했다.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가 한보그룹에 대한 특혜대출에 연루돼 구속됐으며,
여야의 거물급 정치인들과 은행장들이 줄줄이 구속되기도 했다.

몇년째 참혹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은 올해도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한채 해를 넘기게 되었다.

지난 10월 김정일(김정일)이 당총서기에 취임함으로써 김일성사후의
유훈통치를 마감하긴 했지만 북한 주체사상의 대부인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씨의 귀순에서 보듯 지배층의 동요는 한결 심해졌다.

그러나 한국형 경수로를 북한에 건설하기 위한 공사가 지난 8월 착공된데
이어 한반도의 평화정착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4자회담 제1차 본회담이 12월
제네바에서 열림으로써 남북협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평가할만한
남북관계의 진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외부 세계를 휩쓴 변화의 격랑 또한 높았다.

국지적 무력분쟁이 줄어든 대신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신국제경제질서를
둘러싼 부국과 빈국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던 한해였다.

지난 7월 태국의 환율제도 변경으로 촉발된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한국으로 파급됐으며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불러온
일본의 금융위기 역시 세계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며 해를 마감하게
됐다.

아시아의 경제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7년째 장기호황을 지속,
사상 최대의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장기호황은 과감한 구조조정과 생산성향상을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IMF협약에 따른 경제개혁을 추진중인 우리에게 지극히
교훈적이다.

중국은 지난 2월 최고지도자 덩샤오핑(등소평)의 사망으로 대장정세대의
종언과 더불어 장쩌민(강택민)으로 대표되는 젊은 기술관료의 시대를 열었고,
7월에는 1백55년만에 홍콩을 되돌려받음으로써 대중화(대중화)경제권의
첫발을 내디뎠다.

지구촌의 이같은 변화와 관심의 방향은 크게 보아"경제"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 역시 선진경제 진입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거품빼기 과정이라고 할수 있다.

양적 성장에 익숙한 우리에게 있어 거품을 걷어내고 경제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런 과제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 소명의식에 충일한 정부와, 불굴의 투지로 무장한 기업과, 절제와
인내를 아는 국민만이 이 어려운 과업을 달성할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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