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밤늦게 귀가하였다.

잠을 자는 막둥이 녀석을 보면서 "저녀석 배는 곯리지 않아야 할텐데"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아이들에게 충분한 음식을 먹일수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엊그제만 하더라도 이 나라의 외환분위기가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행히 미국의 협조로 한고비는 넘겼다.

그러나 서방의 채권국들이 우리에게 몇번이나 기회를 줄것인가.

솔직히 이야기하면 IMF 유동성조절자금을 주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는
다 하였다.

그 다음은 우리가 스스로 자기개혁을 시도하여 해외 민간투자자들의
신인도를 높이고, 이를 통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언론에 심심찮게 국가파산을 일컫는 "모라토리엄"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요며칠 사이에도 서방 선진국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완벽한 국가파산
국면에 처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국가부도는 피해야 한다.

만일 이 땅의 국민들이 국가부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 가공할 피해에 놀란 나머지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될 것이다.

국가파산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한 나라가 "대외채무 지불유예(정지)"사태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IMF가 한국 정부에 유동성 조절자금을 제공했을 때
국가부도 혹은 파산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같은 말 속에는 상황이 더이상 나빠지지 않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섞여 있었다.

다시 말하면 IMF구제금융은 한국이란 나라의 부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도유예 조치였다.

즉 부도가 발생할수 있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경고가 울린 이후에 한국인들이 취하고 있는 일련의
조치들은 지나치게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국가부도를 개인부도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국가부도란 결코 개인부도와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한국의 화폐는 휴지조각이 되고 전국민이 깡통을
차는 것이 국가 부도라고 할수 있다.

국가파산이 선언되고 나면 4천만은 자급자족 경제로 살아가야 한다.

4천만 인구가 자급자족 경제로 살아갈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국 모든 생필품이 배급제로 이루어지게 된다.

돈이 있어도 살만한 물건이 없어지는 상황이 국가파산상태다.

한국의 대외신용도, 특히 금융기관의 신용도가 제로로 떨어지게 되며,
그 시점부터 경상거래는 전면적으로 중지된다.

수출도 없고 수입도 없어지는 그런 상황이 전개된다.

외국과의 무역거래는 금융기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의
금융기관 신용도가 제로로 떨어진다면 수출입이 이루어질수 없게 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수출을 하지 못하게 된 기업들이 연이어 파산하게 되고 원자재 수입이
어려워짐에 따라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는다.

화폐는 휴지가 되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97%를 넘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전부를 해외로부터 들여온다.

현재 에너지 비축분이 2개월정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충분한 것이 아니다.

엄동설한에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전원이 꺼지고, 난방이 끊긴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껴안고 자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이같은 상황을 과장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우리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낙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처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매사를 준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바로 엊그제도 일어날 뻔했다.

어디 이 뿐인가.

당장 사료가격 폭등으로 가축처리문제가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먹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양곡의 총공급량 가운데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61.7%나 된다.

현금이 아니면 식량을 살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에는 기아사태도 피할수 없다.

그래도 80년대 초반에 국가파산을 경험한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는 우리의
경우에 비해서 상황이 좀 나은 편이다.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이 있고 날씨가 따뜻하기 때문이다.

이 엄동설한에 4천만이 연료가 끊기고 식량배급을 위해서 줄을 서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우리가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동원할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야 함을 알수 있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해외투자가들이 다시한번 한국인들을 신뢰할수 있는
방법은 어차피 해야 할 구조조정을 "짧고, 굵게, 스스로, 당장"하는 것이다.

오히려 IMF조건이 무색할 정도로 이사회의 곳곳에 쌓여 있는 노폐물을
제거하는 철저한 구조조정으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자.

"한국 사람들이 진짜로 변화하려고 하는구나"그들이 긴 성탄휴가를 마치고
오는 새해 첫주에 그들에게 감동을 주자.

우리에게 더 이상의 충분한 시간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에도 실기하는 잘못을 범하면 정말 나라가 끝장 남을 알아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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